‘데모크라시 어스(Democracy Earth)’라는 비영리 스타트업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민주주의를 위한 디지털 거버넌스를 제공한다. 설립자 산티아고 시리는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의 지원을 받아, 온라인 투표 솔루션을 제공하는 대규모 오픈소스를 구축 중이다. 그는 지난해 9월 ‘제1회 NPO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해, “현재의 투표 시스템은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낮은 투표율도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라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을 통해 모두가 투표의 투명성을 보장받고, 투표 결과를 집계하고,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온라인 투표 솔루션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지난해 촛불혁명에서 보듯, 기술과 인터넷의 발전 덕분에 시민들은 더 이상 시민단체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낸다. NPO라고 불리는 비영리조직만이 아니라 소셜벤처, 사회적경제 등 ‘목적은 비슷하나 방식은 다른’ 영리–비영리 경계 조직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비영리는 어떻게 변화를 마주해야 할까. 또 건강한 숲을 위해선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2013년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비영리 중간 지원 기관인 ‘서울시NPO지원센터’ 정선애 센터장을 만나 이에 관한 화두를 던졌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 ‘인권재단’ 등을 거쳐온 정 센터장은 2013년 센터가 시작할 때부터 5년째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ㅡ시민사회 30여 년 외길을 걸었다. 그간의 변화를 짚는다면.
“지금은 한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인 것 같다. 광주 항쟁 같은 현대사를 동시대에 겪으면서, 시민운동은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사명감이나 진정성 같은 언어로 모두가 움직였다. 독재정권, 재벌, 정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매일같이 성명서를 쓰고, 기자회견이나 간담회를 열었다. 2000년대 시민사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성공의 경험도 쌓였다. 사회에서도 시민운동 한다고 하면 ‘힘들겠지만 좋은 일 한다’는 분위기였다 보니, 사회적으로 얻는 성취감도 컸다.”
ㅡ그때에 비해 이제는 비영리 ‘위기’를 말하는 이들도 늘었다.
“위기라기보다는 대대적인 전환기라 본다. 사회도 달라졌고, 기존의 경험으로 이해하거나 일반화할 수 없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했다. ‘촛불혁명’때 봤듯, 이제 사람들은 시민단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목소리를 낸다. 조직화하는 대신, ‘느슨하게’ 연결되고 싶어한다. 이들을 엮을 기술이나 플랫폼도 빠르게 발전했다. 조직에 들어오지 않고 개인들이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 조직에 들어갔다가도 기존의 방식과 안 맞아 한다.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게 1세대, 이후 환경·여성 등 세세한 주제에서의 운동이 이어졌던 게 2세대였다면, 새로운 세대의 운동으로 전환이 이뤄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갈등도 있고, 여러 질문이 터져 나오는 시기다.”
ㅡ2013년 센터가 설립된 뒤로 어떤 일을 했나.
“처음엔 기초 체력을 키우는 ‘마중물 지원’에 집중했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엄마가 제 건강을 못 돌보는 것처럼, 시민사회에서 사회적인 사명감을 짊어지면서 조직을 제대로 돌보질 못했다. 역량도 필요했고,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활동가 교육이나 워크숍을 기획했고, 지속 가능 보고서를 만들면서 컨설팅을 지원했다. 공익 활동에 관심 있는 시민들을 연결하는 자리도 만들었다. 3년을 지나 보니 ‘기초 체력’만 키우기엔 조직들이 직면한 과제가 절박했다. 젊은 세대에서 ‘비영리 조직 혐오증’ 이야기까지 나오고, 참여연대에서는 지난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지원 조직으로서의 지원 역량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지난해부턴 ‘변화를 만드는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ㅡ’변화를 만드는 지원’이란 무엇인가.
“비영리 시민단체에서 토로하는 어려움이 크게 3가지다. 돈이 없고, 사람이 없고, 기존의 조직문화가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령 단체가 돈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진 담당자나 단체의 ‘모금 역량’을 키우는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제는 자체 프로그램보단 다른 지원 기관들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려 한다. 소규모 비영리단체들 간에 공간을 공유하면서 임대료를 줄일 수 있는 ‘비영리 코워킹 스페이스’ 모델이나, 단체들이 입주한 공간 데이터를 한데 모아 정보를 나누는 ‘비영리 복덕방’ 같은 모델도 고민 중이다. 은퇴한 시니어를 지원하는 ‘50플러스재단’ 등과 연계해, 여러 소규모 비영리단체의 회계 업무는 한 명의 시니어가 담당하도록 구조를 짜보는 등 새로운 해결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조직문화도 마찬가지다. 그간 ‘조직 내 세대 간 의사소통’을 돕는 프로그램 위주로 지원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세대에게 맞는 유연한 조직 구조를 고민하고, 가능한 방식을 찾아보는 거다.”
ㅡ해외의 비영리 생태계는 어떤지 궁금하다.
“2012년쯤 CSR 관련 미국 기관을 탐방하러 갔다가 ‘임팩트’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예전 시민사회에선 목표나 동기, 명분에 집중하고 프로그램을 나열하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임팩트’는 너무 다른 접근이었다. 어떤 변화를 만들지를 정하고, 그 중심으로 사업을 재구조화하는 걸 보며, 저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시민사회 조직은 이름부터 거대하다(웃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 이름만 들어선 정확히 뭘 한다는지 알기 어렵다. 명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어떤 변화를 만들지 생각하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 최근엔 미국과 영국의 중간 지원 조직도 탐방했는데, 모두 ‘증거 기반(evidence-based)’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들어간 돈이 의미 있는 결과를 냈는지 데이터로 증명해야 한다는 거였다. 피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본다. ‘명분이 좋으면 좋은 것’이던 때는 지났다. 그 틀로는 새로운 세대와도 맞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처음 지원을 시작한 ‘비영리 스타트업’이 주는 함의가 크다.”
ㅡ‘비영리 스타트업’은 어떻게 다른가.
“비영리 스타트업은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한다. ‘반려견 코의 비문(鼻紋)을 인식하는 기술로 유실견 안락사를 줄이겠다’, ‘동네 언니 오빠가 동네 아이들과 놀아주겠다’는 식이다. 시작하는 동기도 다르다. 거대한 사명이나 희생이 아니다. 본인의 관심이나 재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대신 스타트업의 실행력을 더해, 작은 아이디어 중 실행 가능한 것을 ‘프로토타입’으로 만들고, 그걸 반복해보면서 조직으로 커진다. 규모를 키우고(scale-up),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올해도 더 많은 팀을 지원할 예정이다.”
ㅡ비영리를 지원하는 비영리로서, 센터 자체적인 고충도 있을 것 같은데.
“민간위탁제도 자체에서 오는 고충이 있다. 행정이 민간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제도여야 하는데, 기존의 관행하에서 정부 일을 위탁하는 정도로 여겨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밖에선 센터가 유연한 조직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선 행정 관료 기준에 따라 절차가 갖춰져 있다 보니 괴리를 느끼는 활동가들도 많다. ‘중간 지원 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1세대이고, 행정 예산으로 운영하면서 고민하는 면이 있다. 서울시 예산에 달려있다 보니 모든 사업을 할 때에도 혼자 하기보단 공공재를 쌓는다는 마음으로 다른 곳과 협력해서 일한다.”
ㅡ비영리 시민사회가 더 건강해지려면, 어떤 고민이 더 필요할까.
“전환기일수록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변화의 계보를 읽는 자리를 마련했다면 올해는 변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서, 기존 단체 중엔 좀 더 유연한 노동 형태를 고민하는 곳이 늘 것으로 생각한다. 공익 활동가 인권 노동 가이드라인 등을 만들어 보면서, 노동과 활동이라는 주제를 두고 더 많은 대화를 만들고자 한다. 정부와의 관계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민사회는 마냥 정부를 견제하고, 정부에서 사업을 위탁하는 형태는 맞지 않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공동 파트너로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의 30년을 위해 전환기에 작은 물꼬를 만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