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만에 도면을 3D로 구현하는 남자
[사회문제를 보면 일자리가 생긴다-②]
3D 모델링 기술로 세월호 내부 구현한 건축가
‘어반베이스’ 하진우 대표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 아래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다.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오보로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불안과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해경이 투입됐지만 구조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물이 차오르고 있는 세월호의 내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종이에 그려진 도면 뿐. 구조대의 어려움을 뉴스로 전해들은 하진우(35) 어반베이스 대표는 컴퓨터 앞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당시 설계도를 자동으로 3D화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던 그는 인터넷을 뒤져 세월호의 설계도와 내부 사진을 찾았다. 세월호의 3D 모델이 있으면 배의 내부공간을 미리 파악할 수 있을 테고, 구조를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델링 작업을 마친 그는 18일, 완성된 파일을 해경에 전달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한 시간 마다 하대표에게 ‘모델을 더 기울여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하 대표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30m 해수면 아래 완전히 누워있는 세월호를 구현하는 것. 안타까움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하대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있기 전까지는 도면을 가상현실로 구현하면 재밌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면 좋을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죠. 그런데 그 날 이후, 이 기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낯선 건물 안으로 불을 끄러 들어가야 하는 소방관이나, 건물에 숨은 범인을 진압해야 하는 경찰 등 사회 안전을 위해 일하는 분들을 비롯해 공간의 제약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모든 분들께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하대표가 2013년 설립한 IT스타트업 어반베이스의 핵심 기술은 2D 도면을 1~2초 만에 3D 모델로 구현하는 것. 도면이 그려진 그림파일을 얹어놓기만 하면 프로그램이 미리 입력된 건축법규와 그간 학습한 건축도면 정보에 따라 공간의 쓰임새를 추측해낸다. 이 건축판 ‘인공지능’에 국내와 미국 투자자들은 지난해까지 총 10억원을 투자했다. 어반베이스는 현재 아파트 120만 세대의 도면 정보를 상용화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이를 공개하고 있다.
◇1초 만에 도면을 3D로…가상에 또 하나의 현실 만드는 것이 꿈
IT회사의 창업자지만, 하대표는 원래 건축학과를 졸업한 건축가다. 설계사무소에 몸담고 있던 그는 ‘자신이 지은 건물 앞에서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 건축 산업은 이미 정체기를 맞은 상태였다. 그가 일하던 설계사무소 역시 경제 위기 이후 사옥을 내놓았고, 당시 급부상하던 IT회사가 이를 인수했다.
“20년 넘는 업력을 가진 탄탄한 회사가 창업 2년도 채 되지 않은 회사에 사옥을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건축가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서 우리의 삶은 더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사람의 손도 필요 없어지고 있었어요.”
변화는 이미 다가와 있었다. 선배 건축가들 밑에서 오래 참고 배워야 한다지만, 모두 원하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공중에 뜬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구글의 위성지도 서비스인 ‘구글어스’와 VR기기 회사 ‘오큘러스’의 성공이었다.
“위성으로 모든 도로정보가 축적되는 동안, 건물 안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었어요. 구글어스로 전 세계의 모든 길을 볼 수 있듯 세계의 모든 실내공간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현만 된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거나 몸이 불편해 먼 곳을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볼 수 있을테니까요. 당시 제가 하던 일이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건물 정보를 기반으로 만든 3D 디지털 모형)’ 제작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기심도 컸습니다.”
어려서부터 취미로 하던 코딩이 그의 꿈을 뒷받침했다. 설계능력도 있고, 코딩기술도 있으니 이 둘을 조합하면 뭔가 될 것 같았다. 2013년 회사를 나와 어반베이스를 창업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논현동의 옥탑방에서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직원만 12명에 이른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아 특허도 등록했다.
업계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영업팀이 따로 없음에도 지난해 7월 정식 서비스를 론칭한 후, 계약을 맺은 제휴사만 30여곳이 넘는다. 실거래가를 공개하는 부동산정보 플랫폼 ‘호갱노노’는 집을 찾는 이들에게 어반베이스의 도면을 통해 공간을 미리 보여준다. 디자인가구기업 ‘카레클린트’는 어반베이스의 집꾸미기 서비스에 3D 상품 모델을 도입, 가상현실 속에서 미리 가구를 배치해볼 수 있도록 했다. 하대표는 “현재 회사의 수익모델은 인테리어 제품 중개 수수료와 배너광고에 집중돼있다”면서 “공간 정보 공유를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구성원 모두의 지향점”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세상…사람의 경쟁력 아직 남아있어
“어느 순간 월급이 내가 일을 한 대가가 아니라, 참고 견딘 대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값’을 받는 기분이었달까. 직업이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느껴지니 더 이상 일할 맛이 안 났어요.”
지금은 새로운 시장을 구축해 성공가도에 올라섰지만, 하대표에게도 창업은 큰 도전이었다. 그는 ‘급여’라는 양날의 검에만 매달려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도 컸다. 세상은 저만치 앞서 달려 나가고 있는데, 건축계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젖어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만 선배들과의 가치관도 너무 달랐다. ‘세대 간 갈등’을 넘어 함께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는 동료가 절실했다.
창업 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힘을 보태준 이경우 CTO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창업자금 대출심사에 합격한 후, 가장 먼저 초빙한 사람이다. 이후에 어반베이스의 안살림을 책임질 김덕중 COO가 합류하고 마지막으로 마케팅 전문가인 오세준 CSO가 합류했다. 하대표와 이경우 CTO, 오세준 CSO는 1982년생 동갑내기 친구로, 한 살 어린 김덕중 COO가 조교로 있는 군대에서 동기로 처음 만났다.
“영화 ‘쿨러닝(Cool Runnings)’을 보면 오합지졸이 모인 팀이라도 균형이 잘 맞으면 큰 힘을 발휘하잖아요. 처음 회사를 만들 때도 전문성보다는 조직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사람과 함께하기보다는, 개인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완벽한 조직을 만들고 싶었죠.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하다보니 조직 안에 불필요한 마찰이 없습니다. 지난해 회사를 방배동 사무실로 이전할 때도 김덕중 COO가 ‘여기 괜찮다’며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럼 그러자’ 하며 바로 계약을 맺었을 정도니까요(웃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것, 그게 어반베이스가 갖는 가장 큰 강점입니다.”
세상에 없던 기술로 새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만큼, 후배 건축가들을 위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젊은 건축가를 위한 교양교육단체 ‘공동건축학교’를 찾아 ‘미래의 건축’에 대한 강의를 펼쳤다.
“4차 산업혁명을 두고 흔히 ‘노동의 종말’이라고 합니다. 신기술 하나가 노동시장 전체를 와해시킬 만큼의 파급력을 갖는 시대죠. 일본의 로봇은행원 나오(NAO), 미국의 인공지능 파산관리전문 변호사 로스(ROSS), 국내에서도 활동 중인 인공지능 전문의 ‘닥터 왓슨(Watson)’ 등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은 이미 상용화되고 있습니다. 건축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가지는 책임은 막중하죠. 하나의 프로젝트에 많게는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들어가고, 작은 실수로도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검증과 높은 윤리기준이 필요한 영역인 만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은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