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 시장 970여 개 조직 등록…규제·평판 위험 낮춰 자산가·금융기관과 연결
‘성과 마켓플레이스’로 사회성과 기반 지원 실험도
“아시아에 자본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자본을 가진 사람과 그 돈이 필요한 사회문제 해결 조직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케빈 테오 AVPN 임팩트콜랩(ImpactCollab) 총괄 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지난 8월 25일 인도 뉴델리 ‘2026 AVPN 글로벌 콘퍼런스’에서 <더나은미래>와 만나 아시아 필란트로피 시장의 가장 큰 병목으로 ‘신뢰의 부재’를 꼽았다. 기부할 의사가 있는 자산가와 금융기관은 있지만, 어느 단체를 믿고 지원해야 할지 판단할 만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기부하려면 국가마다 다른 해외송금 규정과 기부금 수령 절차도 확인해야 한다. 반면 현지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단체와 사회적기업은 사업 성과가 있어도 이를 표준화된 방식으로 보여주기 어려워 자금과 연결되지 못한다.
AVPN이 2024년 출범시킨 ‘임팩트콜랩’은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만든 플랫폼이다. 싱가포르 통화청(MAS)과 게이츠재단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의 사회문제 해결 조직을 검증하고, 이들의 활동과 성과를 표준화된 데이터로 구축한다. 기부자는 이 정보를 토대로 관심 분야에 맞는 단체를 찾고 비교할 수 있다. 현재 약 20개 시장, 970여 개 임팩트 조직이 여기에 등록돼 있다.
임팩트 콜랩을 출범시킨 케빈 총괄은 “자산가와 이들의 자산관리를 담당하는 금융회사들이 우려하는 규제 준수 및 평판 리스크를 데이터 기반의 검증을 통해 낮추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 신뢰를 수치로…6개 영역 심사해 ‘검증 프로필’ 구축
임팩트콜랩의 출발점은 기부받을 조직에 대한 검증이다. 아시아 각국의 비영리단체와 사회적기업이 플랫폼 등록을 신청하면, AVPN은 은행의 고객확인(KYC) 절차 등에 활용되는 런던증권거래소그룹의 ‘월드체크(World-Check)’를 통해 단체와 주요 임원진의 금융 규제 준수 여부, 제재 대상 포함 여부, 평판 위험부터 확인한다. 여기에 조직의 투명성과 의사결정 구조, 사업 수행 역량을 살피는 거버넌스 평가가 더해진다.
이 평가에는 싱가포르경영대학교 리엔사회혁신센터와 공동 개발한 ‘거버넌스 성숙도 프레임워크’가 쓰인다. ▲조직의 목적과 임팩트 ▲리더십 ▲윤리성과 건전성 ▲투명성과 책임성 ▲소통 ▲사업의 효과성과 실행력 등 6개 영역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결과는 합격·불합격이 아니라 기반을 다지는 ‘시드(Seed)’, 조직 역량을 갖추는 ‘컬티베이트(Cultivate)’, 확장을 준비한 ‘그로스(Growth)’ 등 성장 단계로 제시된다. 지금까지 130곳 이상이 이 평가를 마쳤다.
심사를 통과하면 표준화된 ‘검증 프로필’이 만들어진다. 단체가 해결하려는 사회문제, 활동 지역, 지원 대상, 기존 성과, 성과 한 건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 거버넌스 수준까지 동일한 형식으로 담긴다. 단체가 스스로 제시한 성과와 조직 정보, 외부 실사 결과를 한 화면에서 비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테오 총괄은 “기부자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이 단체를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며 “어느 기관이 해당 단체를 지원했는지, 왜 지원했는지, 실제 사업 수행 경험은 어땠는지까지 살핀다”고 말했다. 이어 “서류만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AVPN이 아시아 현장에서 축적한 관계와 정보도 활용한다”고 덧붙였다.
자산가와 금융기관은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부처를 검색한다. 관심 의제와 국가, 지원 대상, 기대 성과를 입력하면 조건에 맞는 조직을 추릴 수 있다. 전문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개인을 위해 “환경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일상적인 입력만으로도 관련 의제와 단체를 찾을 수 있도록 자연어 검색과 번역 기능도 넓혀가고 있다.
기부자가 지원할 단체를 정하면 임팩트콜랩과 AVPN이 양측의 접촉을 주선하고, 실제 송금 단계에서는 양국의 해외송금·기부금 수령 규정과 필요한 승인·보고 절차를 확인해 경로를 안내한다. 임팩트콜랩이 기부금을 일괄 수취해 대신 전달하는 구조는 아니다. 검증된 상대를 찾도록 돕고 거래에 필요한 정보와 연결 경로를 제공하는 데 역할을 한정한다.
연결은 지원이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임팩트콜랩은 참여 단체가 더 큰 규모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내부 규정과 이사회 운영, 재정 투명성을 보완하는 역량 강화도 지원한다. 테오 총괄은 “소액 개인 기부를 받아온 조직이 대형 재단이나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으려면 그만큼 높은 수준의 검증 체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멘토링 등을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 성과가 확인된 뒤 지급한다…’성과 마켓플레이스’ 실험
임팩트콜랩은 올해 기부처를 연결하는 기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성과 마켓플레이스(Outcomes Marketplace)’를 시작했다. 기존 기부가 단체의 활동비나 사업비를 미리 지원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사전에 합의한 사회적 성과가 실제로 발생했는지를 외부 기관이 검증한 뒤에야 자금을 연결한다. AVPN은 이를 아시아 최초 유형의 ‘사회성과 거래소’라고 부른다.
첫 사업에는 싱가포르와 태국의 임팩트 조직 19곳이 참여했다. 이들 조직은 일하지 않고 교육이나 직업훈련에도 참여하지 않는 니트(NEET) 청년을 발굴해 직업교육과 취업 연계, 취업 후 적응 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후 교육을 받은 청년이 실제로 취업했는지, 일정 기간 일자리를 유지했는지를 외부 기관이 확인한다. 기부자는 검증된 성과를 살펴본 뒤 해당 성과를 만들어낸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AVPN은 2026년까지 19개 조직을 통해 청년 600명 이상에게 직업훈련과 취업·고용 유지 기회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검증된 성과와 그 경제적 가치가 쌓이면 정부는 이를 예산 배분의 근거로 쓸 수 있고, 재단과 민간 기부자는 어느 사업에 얼마를 지원할지 판단할 데이터를 얻는다. 참여 기부자에게는 달성된 성과와 그 경제적 추정 가치를 담은 보고서가 제공된다.
물론 성과가 발생한 뒤에만 자금을 지급하면, 재정 여력이 부족한 소규모 단체가 사업비를 먼저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측정하기 쉬운 사업에만 자금이 몰리고, 성과가 나타나기까지 오래 걸리는 복잡한 사회문제는 오히려 지원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케빈 총괄은 이런 한계를 고려해 우선 기존 인력과 사업 기반을 갖추고 서비스를 제공해 온 조직에 성과 자금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성과의 정의가 비교적 명확하고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분야부터 적용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는 “정서지능 향상처럼 사람마다 정의가 달라질 수 있는 성과보다 청년이 취업했는지, 일자리를 유지했는지는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며 “정부 정책과 연결될 수 있고 사회적 필요와 확장 가능성이 큰 분야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케빈 총괄은 이 플랫폼이 만들어지는 배경에 아시아의 부의 세대교체가 있다고 봤다. 빠르게 부를 축적한 세대에서 자산을 물려받은 젊은 세대로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단순한 자산 증식을 넘어 삶의 의미와 사회적 기여를 찾으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필란트로피가 소수의 자산가와 전문가만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 많은 자산가와 시민을 끌어들이려면 복잡한 금융 용어나 성과 지표를 쉽게 풀어내고, 누구나 신뢰할 만한 기부처를 찾을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문제는 특정한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데이터와 플랫폼을 통해 기부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궁극적으로 누구나 필란트로피에 참여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