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재발견] 돌봄, 모두의 삶을 관통한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기혼자들의 워라밸을 위해 청년들의 워라밸이 희생됐다.” 

경력보유여성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채용을 시도했던 한 조직의 피드백이었다. 기혼자이자 부모로서, 그리고 인사·조직문화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이 한마디는 오랫동안 마음을 짓눌렀다.

“우리 회사의 모든 축하와 인정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 같다”는 한 동료 구성원의 말에도 오랫동안 마음이 시렸다. ‘자녀가 없는 직원에 대한 역차별 우려’로 직장 어린이집 설치를 포기했다는 한 글로벌 기업의 기사도 역시 쓰린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고단함을 살피는 일이 다른 이를 소외시키는 일은 아닐까. 그런 우려 속에서도 우리는 직장 어린이집을 설치했다. 모성 보호 관련 취업규칙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육아 중인 직원들을 위한 슬랙 채널을 열었다. 방학 중 자녀 대상 프로그램도 마련해 작은 공동 육아 실험도 시도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회사를 만들자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일하기 좋은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큰 동료들이 돌봄을 이유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고자 했다. 육아라는 특정한 사례를 우대하기보다, 구성원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정책 과정도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유했다. 리더들은 반복해서 철학과 방향을 설명하며, 이 정책이 특정 그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렸다.

◇ 우리 모두에게 흐르고 겹치는 ‘돌봄’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돌봄이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 돌봄의 책임을 안고 있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부터 우연히 만난 대형견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 연로한 친척 어른을 모시고 주기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일, 혹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부모님께 마음을 쓰는 일까지. 돌봄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의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삶의 여러 모퉁이마다, 예상치 못한 방식의 수많은 돌봄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모든 돌봄을 정책으로 아우를 수는 없었다. 자녀 돌봄처럼 제도화가 쉬운 영역이 있는가 하면, 복합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은 제도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히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돌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연결을 이해하는 데 ‘공감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돌봄을 연결하는 ‘공감적 상상력’

가장 깊이 남은 경험은 바로 이 공감적 상상력이 자극된 순간이었다. 동료들의 돌봄 여정을 눈으로 보고, 함께 경험하는 자극은 강력했다. 고단한 현실에서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러나 다양한 삶의 주기를 지나고 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돌봄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이주연 연구원(Diversity in Action)은 ‘일터와 가정의 연결이 만드는 공정한 조직’ 연구에서 “공감적 상상력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핵심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문학이나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지적·감정적으로 상상하는 힘이다.

공감적 상상력은 단순한 배려와는 다르다. 현재 돌봄의 책임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누구나 돌봄의 주체가 되거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삶의 근본적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돌봄 위에 서 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돌보거나 돌봄을 받게 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회 안에서의 깊은 연결성을 자각할 수 있다.

돌봄은 종종 고정된 책임처럼 보인다. 어린이집 혜택을 받는 소수, 받지 못하는 다수로 나뉘고, 그런 경계는 영구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공감적 상상력은 이런 인식을 허문다. 돌봄은 한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돌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돌봄의 경계는 유동적이며, 사회를 잇는 보편적 경험이자 지속가능성을 위한 핵심 조건이다. 우리가 돌봄을 둘러싼 정책을 고민하는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 함께 살아가는 조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 이전에 공감적 상상력이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 참고
– 이주연 (2025). 『일터와 가정의 연결이 만드는 공정한 조직』, 루트임팩트 기고문

루트임팩트의 <돌봄의 재발견>

‘포용’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많은 조직들이 여전히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용적인 조직이란 결국 ‘돌볼 줄 아는 조직’이라고 믿습니다. 루트임팩트는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돌봄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직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필수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은 ‘돌봄’을 자신과 조직의 일로 다시 생각해보고, 포용적 조직을 위한 돌봄의 범위와 정의,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누구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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