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청소년 돕는 비영리단체 ‘별을만드는사람들’ 심규보 대표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순간이 돌이켜보면 축복이 될 때가 있다. 심규보(34·사진)씨도 그랬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2006년 폭행 사건으로 구치소에 송치된 심씨. 10개월간 재판을 받으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다. 마약 혐의로 들어온 조폭 두목부터 10원짜리 내기 장기를 두다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노인까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었다.
“수감자 중에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상대적으로 저는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탄원서를 써 달라고 하나둘씩 찾아왔어요. 제가 써준 탄원서로 형량이 많이 깎였다는 소문이 나니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저를 찾았죠. 탄원서를 쓰다 보니 이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자들의 유년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정이 어렵거나 혹은 깨졌거나, 그 사람을 둘러싼 ‘지지 환경’이 부족했다. 심씨의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엔 매일 탄원서를 쓰느라 혹만 한 굳은살이 생겼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40시간으로 풀려난 심씨. 그는 구치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유년기’를 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다. 이 생각은 봉사를 하면서 더 굳어졌다. 처음 찾아간 곳은 다운증후군 재활센터. 옷핀을 만드는 작업장에서 만난 장애인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말을 반복하는 거예요. 이분들 수명이 서른 살을 넘기가 어렵거든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지정된 봉사 단체 외에 다른 기관도 여러 곳 찾아다녔다. 지금까지 인증받은 봉사 시간만 2400시간. 의무 봉사 시간의 10배다.
“뇌병변 장애인들의 식사를 도와주는 곳에 갔습니다. 숟가락으로 입에 음식을 넣어줘도 제대로 씹지를 못해요. 저와 동갑내기인데 말이죠. 시각장애인협회에 자원봉사하러 가서 만난 형이 있어요. 그 형은 스물다섯 살 때 오토바이 사고로 시력을 잃었대요. 실례되는 질문인 줄 알지만 물어봤어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게 나을까요, 후천적으로 실명된 게 더 나을까요’ 하고요. 형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어요. ‘난 스물다섯 살까지 봐서 괜찮다’고요. 제가 참 가진 것이 많구나, 그런데 그저 불평하고 살았구나 싶었어요.”
◇구치소에서 깨달은 삶의 중요한 가치
심씨는 후천성 뇌전증 환자였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온 것처럼 학교 수업 시간에 첫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너무 놀라 오줌을 지렸다.
“스트레스 때문에 뇌전증이 온 거라고 하더군요.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사춘기에 엄청 방황을 했어요. 외박도 자주 하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어요. 학교생활에 적응도 못 했죠. 근데 발작까지 시작된 겁니다.”
3일에 한 번꼴로 발작 증세가 나타났다. 3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정신을 잃어 떨어진 적도 있었다. “병원에서 6일 만에 깨어났다니깐요.” 결국 학교 밖 청소년이 된 심씨. 몸엔 문신이 새겨졌고 주위엔 ‘문제아’들이 모였다. “그땐 뭣도 몰랐어요. 친구가 절단기를 가지고 상가를 터는 걸 그냥 보고 있었어요. 프라모델(부품을 조립하여 만드는 장난감)을 던져줘서 받았는데, 그게 절도가 된 거죠.” 심씨는 보호처분을 받아 한 달간 소년원에서 생활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그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검정고시로 전문대에 진학한 심씨는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생활을 연명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폭행죄로 구치소에 수감된 것. 여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상대방을 두들겨팼다고 한다.
“처음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불만이 많았어요. 수감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내 문제만 바라보면 답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돌리니 해답이 보였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진짜로 도와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사실 친할아버님이 대구에서 1만평 되는 부지에 ‘평화보육원’을 만드셨어요.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부산에서 ‘희락원’을 운영하시고요. 사회사업을 했던 피가 흐르는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타인을 도우며 인생의 ‘사명’을 찾다
구치소를 나오자마자 먼저 백석대학교 청소년학과로 편입을 결정했다. “전기기사는 먹고살려고 배운 거라면, 이젠 사명(使命)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대구대 재활심리학과 석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범죄심리사(1급), 전문상담사(2급), 임상심리 전문가(수료) 등 심리 관련 자격증은 모조리 땄다. “임상심리 전문가가 되려면 병원에서 3년 동안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해요. 질병 증상이라든지 정신 병리와 관련된 용어까지 다 외워야 하니깐 쉽지 않죠. 심리학 전공자 중 10%만 임상으로 빠져요.” 심씨는 지난달 영남대 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심리 전문가 수련 과정을 마쳤다.
그는 현재 대구 지역 9개 경찰서를 관할하는 ‘범죄심리사’다. 가방에서 주황색 파일 안 서류 더미를 꺼내 들었다. “소년범의 경우 판사가 범죄심리사의 자문을 참고해 판결을 내립니다. 아이의 면담 태도가 어땠는지, 엄마와 함께 출석했다든지 주위 환경을 체크하고, 심리검사도 합니다.”
2013년에는 법무부로부터 소년원 출신 성공 인사를 일컫는 ‘푸르미 서포터즈’로 위촉도 받았다. 이들은 소년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성 교육 및 강의 활동을 한다. 30여명의 서포터즈 중 전국 강사로 선정된 사람은 3명. 심씨도 그중 한 명이다. 심씨는 “10년 전 구치소에서 꿈꿨던 일들을 실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상담한 위기 청소년만 1000여명.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병원에서 임상심리사 수련 중일 때 만난 한 아이는 왕따를 심하게 당한 케이스였어요. 표정은 어두웠지만 내적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머님도 항상 같이 오셔서 돌봐주시고. 그래서 ‘약 먹는 것보다 먼저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죠. 그 아이를 1년 동안 만났어요. 무기력한 아이였는데 우선 ‘실컷 놀라’고 했죠. 같이 영화도 보고, 뮤지컬도 보고, 놀이공원도 갔어요. 원래 학교에 적응을 못 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퇴했었는데 어느 순간 ‘전기를 만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공고에 진학하더니 전교에서 1~2등을 도맡아서 하는 거예요. 이젠 대학생이 됐어요. 요즘에도 전화 와서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이런 게 진짜 제 월급이라고 생각해요.”
◇위기 청소년 돕는 비영리단체 설립까지
올해 초부터는 진짜 ‘사회사업가’가 됐다. 별을만드는사람들(이하 별만사)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며 위기 청소년과 뇌전증 청소년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알음알음 개인 차원에서 나눴던 경험을 단체로 확장해 더 많은 청소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심씨의 지인, 경찰관 등 40여명도 후원 회원으로 힘을 보탰다. 별만사에서는 위기 청소년들의 심리, 진로 상담과 일대일 멘토링 사업을 진행한다.
“대구소년원에 160명이 입소해 있습니다. 그중 80% 이상이 결손 가정이에요. 가정만 건강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별난 애들이 별을 달 것인지(범죄자가 될지), 특별한 사람으로 클지는 부모의 몫이 큽니다. 만약 아이들을 지지해줄 부모가 없다면 별만사가 그 역할을 하려고요.”
가장 놀라운 일은 심씨 본인에게 일어난 변화다. 심할 때는 한 달에 10번까지 발작 증세가 일어났는데 발작이 없은 지 벌써 3년이 넘었다고 한다. 심씨는 “뇌전증의 경우 대부분 스트레스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심리를 잘 다뤄줘야 발작 빈도도 낮아지고 삶의 질도 좋아진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신 건강을 다스린 이후부터 발작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 운전대를 제대로 잡은 지도 벌써 5년째다. 만성뇌전증 환자의 경우 2년간 발작이 없어야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
“뇌전증 환자도, 위기 청소년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뇌전증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도 별만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뇌전증 환자는 40만명(추정치). 인구의 1%가 뇌전증을 앓고 있는 셈. 하지만 뇌전증에 대한 편견 때문에 뇌전증 환자들은 취업하기도, 사회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기도 쉽지 않다. 심씨는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다.
“제가 대학원에서 논문 발표할 때 쓰러졌어요. 정말 창피했어요. 워낙 스트레스 상황이라 3~4년 만에 발작이 온 거죠. 다행스럽게도 대학원 동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봐줬어요. 드라마 ‘응팔’(응답하라 1988)에서도 나오잖아요. 뇌전증 환자들에겐 깨는 순간이 가장 힘들어요. 주위 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잘 대해주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답니다.”
심씨는 인터뷰 동안 “간질은 잘못된 말”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간질(癎疾)의 정식 명칭이 ‘뇌전증(腦電症)’으로 바뀐 것은 2010년. 간질이 뇌전증 환자를 비하하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뇌전증은 한자 그대로 ‘뇌에 전기 신호가 온다’는 뜻이다. “사람 몸은 전기 자극으로 움직이잖아요. 쉽게 말해 뇌전증은 뇌파 전달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갑자기 콘센트가 빠진 거랑 같아요. 근데 민간에서는 귀신 들린 병이라고도 불렀죠. 지금은 신경외과에서 진료를 하는데, 5~6년 전만 해도 정신과로 갔어요.”
오는 4월 20일 심씨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서울·대전·대구 등지에서 뇌전증 관련 인식 개선 거리 캠페인을 진행한다. 뇌전증 환자든 위기 청소년이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 유연해지는 것’이라 했다.
“절 있는 그대로 받아주던 수퍼마켓 형이 있었어요. 연락하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줬습니다. 지금은 저를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김길태 같은 경우 길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이 길태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 이름은 별 규(奎)자에, 도울 보(輔)입니다. 과거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이젠 이름대로 진짜 별들을 돕고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만약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걸 알면 삶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