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일)

농가 위해서, 혼자 먹기 외로워서… 우리는 ‘밥 일’을 시작했다

바른 식문화 위해 뛰는 청년 4인

아토피 경험… 10년간 자취 생활하며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 가져

산나물·고춧가루 등 농가서 직접 공수
가격보다 정직한 먹거리 우선시

‘밥 일’ 하는 청년 CEO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추·산나물 등 할머니들이 생산한 친환경 농산물을 1년에 20여t 이상 유통 중인 김가영(29) 경북청송산나물밥집 ‘소녀방앗간’ 이사, 일주일에 300개가 넘는 밥 모임을 연결하는 박인(29) 소셜 다이닝 ‘집밥’ 대표, 지난 3년간 500명이 넘는 청춘들에게 ‘슬로푸드’를 전파한 장시내(24) ‘슬로푸드청년네트워크’ 대표, 숙성 식초·유기농 치즈와 요거트 등 시판 제품과는 질이 다른 식품으로 연매출 3억원을 거둔 한민성(33) ‘둘러앉은 밥상(이하 둘밥)’ 대표책임사원(이상 ‘가나다’ 순)이 ‘더나은미래’를 찾았다. 자칭 ‘밥 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밥 잘 먹는 법’은 무엇일까.

“밥을 그 자체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세대가 지금의 청년인 것 같아요.” 네 사람은 “젊기 때문에 오히려 ‘밥상걱정’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 왼쪽부터 김가영 소녀방앗간 이사, 장시내 슬로푸드청년네트워크 대표, 한민성 둘러앉은밥상 대표, 박인 집밥 대표. /조철희 더퍼스트 기자
“밥을 그 자체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세대가 지금의 청년인 것 같아요.” 네 사람은 “젊기 때문에 오히려 ‘밥상걱정’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 왼쪽부터 김가영 소녀방앗간 이사, 장시내 슬로푸드청년네트워크 대표, 한민성 둘러앉은밥상 대표, 박인 집밥 대표. /조철희 더퍼스트 기자

사회=어떻게 ‘밥 일’을 시작하게 됐나.

한민성(이하 한)=2007년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 강원도 화천에서 애호박 농부 아저씨의 트럭을 얻어 탔다. 한 달간 아저씨 댁에서 일손을 거들며 숙식을 해결했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0개들이 애호박 한 박스의 납품가는 2500원인데 서울에서는 1000원 정도였다.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 과다한 유통마진이 끼어있던 거다. 이 불합리한 구조를 풀고자 3년 후 농산물 유통기업 둘밥을 창업했다.

장시내(이하 장)=어렸을 때 아토피를 앓았는데, 어머니가 유기농 재료로 직접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건강이 좋아졌다. 이를 계기로 중학생 때부터 요리를 배웠는데, 재료들이 내가 먹고 자랐던 것과 다르더라. 제대로 된 식재료를 찾던 중 슬로푸드를 알게 됐고, 열아홉 살 때 남양주에 있는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를 무작정 찾아갔다. 그곳 활동가로 일하면서 청년의 패기로 올바른 식문화를 알려보고자 슬로푸드청년네트워크를 설립했다.

박인(이하 박)=2012년 여의도에서 컨설팅 회사를 다니다가 ‘삭막해서 더는 못하겠다’고 뛰쳐나왔다. 당시 자취 10년차라, TV 보며 아몬드 1㎏을 혼자 다 먹는 등 식이장애가 왔던 것 같다. 몸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 달라지지 않을까’란 생각에 ‘1일 집밥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SNS를 통해 자취생·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셜다이닝 사업을 시작했다.

김가영(이하 김)=어렸을 적부터 먹고 자는 문제가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땅은 정직하게 일하면 그만큼 대가를 준다고 생각해,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20세 때 지리산 자락으로 갔다. 동네 할머니들과 같이 살아보겠다고 농작물을 대신 팔아드리다 보니 유통 사업도 커지고, 대형 외식 프랜차이즈 이사직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자꾸 회사를 위해 농민을 희생하는 관계가 되풀이됐다. 그래서 밥집을 차렸다. 할머니들한테 제값 주고 사온 작물로 밥 만들 사람이 나밖에 없더라. 그 밥집이 지난해 성수동에 문을 연 소녀방앗간이다.

사회=먹거리를 다룰 때 가장 신경 쓰는 점은 무엇인가.

=둘밥이 유통하는 농산물은 긴 시간 검증을 거친다. 절임 배추의 경우 발굴부터 유통까지 3년이 걸렸다. 당장 겉모양뿐만 아니라 김치를 담갔을 때 숙성은 제대로 되는지, 맛은 어떤지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6년을 키워야 하는 삼(蔘)은 수수료 없이 오프라인 판매를 지원하기도 한다. 무게가 상품 기준이 되는 시장에서 구근비료를 쓰지 않는 농가의 자립을 도우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농산물 시장에서 유통은 ‘수퍼 갑’이다. 반값 행사를 해도, 천재지변으로 농사가 망해도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가 떠안는다. 반면 소녀방앗간의 산나물, 간장, 고춧가루 등은 우리가 청송에서 직접 생산한다. 생산이 안 되는 식재료는 산지에서 구매해 차로 실어온다. 생산부터 유통, 소비까지 농가와 함께 책임지는 구조다.

◇건강하게 제대로 먹는 밥, 비싸고 불편하단 건 편견

사회=잘 먹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제약이 있지 않나.

=둘밥 제품은 단가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일 평균 20~30건의 주문이 들어오는데, 구매자 대부분이 서초·강남 등에 밀집해 있다. 하지만 유통 마진을 줄인 절임 배추나 단호박은 생협보다 저렴하다. 유기농 매장에서 20만원 선에 판매했던 배 선물세트와 포장만 다른 둘밥의 선물용 배 세트는 5만8000원이다. 무조건 비싸다는 것은 편견이다.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것 중 버려지는 것도 있다. 한겨울에 딸기가 나고, 사시사철 쌀이 있으니 농산물을 공산품처럼 여기게 된 탓이다. 그래서 청년네트워크는 2013년부터 버려지는 농산물 200㎏으로 시민 50명과 음식을 해 나눠 먹는 ‘요리가무’를 진행 중이다. 유통 과정에서 얼마나 큰 낭비가 자행되고 있는지 소비자들도 인식해야 한다.

=’같이 먹는 밥은 불편하다’ ‘식사 시간을 따로 내기 번거롭다’는 시선이 있는데, 요즘 밥에는 다른 목적들이 많아서 그렇다. 사회에서 먹으면 비즈니스 미팅이고, 집에서 먹을 때도 ‘결혼 언제하니’ 한마디면 목이 메지 않나. 원래 같이 먹는 밥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그걸 경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밥 먹는 시간에 밥을 먹으면 된다.

사회=밥상이 왜곡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녀방앗간 음식엔 설탕을 안 넣는다. 한식의 단맛은 원래 다당 성분으로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한식 명인이라는 사람이 TV에 나와 갈비찜에 설탕을 집어넣고 있으니 젊은 세대는 우리가 원래 뭘 먹었고, 그 맛이 뭔지도 몰라서 소외당하는 셈이다.

=집밥은 초창기부터 바르고 정직한 먹을거리를 파는 밥집과 모임을 잇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자극적인 맛에 치중한 가게만 인기가 높고, 양심 있는 집들은 3년도 못 가 문을 닫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가정식’을 표방한 레스토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습을 보면 요즘 사람들은 집밥을 유행으로 소비하는 듯하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속상하더라.

사회=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지난해 11월, 매년 초에 농산물을 매입하는 ‘농사 펀드’를 만들었다. 소비자가 1년치 농작물을 미리 구매해 농가의 판로 부담을 덜어주는 시스템이다. 소비자들은 내가 먹는 농산물을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 과정을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소녀방앗간 2호점이 4월 건대입구에서 문을 연다. 올해 안에 5호점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30~40년씩 오래오래 믿을 수 있는 밥집을 운영할 점주들을 모시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5월 오픈하는 ‘커뮤니티카페 성수’에서 매월 1회 커뮤니티 키친을 운영할 예정이다. 인근에서 자취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밥 짓는 법부터 치킨 튀기는 법까지 요리에 대해 알려주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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