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
10년 새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빈곤 아동’ 문제에 집중하던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기후변화’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재단은 최근 ‘기후변화체감ing’라는 영상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4일 만난 이제훈(81)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은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재단의 목표라고 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이들의 행복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없애고 개선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기후변화 캠페인도 그중 하나다.
“우리가 기후변화 캠페인을 한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린이재단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야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환경 단체가 할 일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행복과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요.”
기후변화와 초저출생
―아이들을 가장 위협하는 게 ‘기후변화’라는 얘기네요.
“2018년 폭염, 2019년 태풍, 2020년 코로나19와 기록적 폭우. 모두 기후변화와 관련 있어요. 기후변화는 아이들의 생존권은 물론 발달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이들이 살아갈 10년, 20년 후의 세상은 생지옥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을 챙기는 것도 재단이 할 일이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다. 재단의 캐치프레이즈예요. 뻔한 말이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됩니다. 아이들을 돕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현재가 따로 있고 미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연결돼 있어요.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면서 미래를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서둘러 준비해야 하는 미래가 ‘기후변화’입니다. 캠페인을 통해 기후변화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이들이라는 걸 알리고 환경이 더 나빠지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질 계획입니다.”
―재단의 방향성이 바뀐 건가요.
“시대가 바뀐 거죠. 재단이 생긴지 73년 됐어요. 역사가 오래된 만큼 ‘최초’도 많습니다. 1981년 정부로부터 전국불우아동결연사업을 위탁받아 민간에서 최초로 운영하기 시작했고, 1983년에 미아찾기운동도 가장 먼저 벌였어요. 1989년에는 한국아동학대협회를 창립해 국내 최초로 아동 학대 예방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동안 어려운 아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일에 주력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전히 재단을 ‘어려운 아이들만’ 돕는 단체로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인가요?
“물론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도 많이 하고 있지만, 지금은 ‘모든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는 옹호 활동에 주력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하는 캠페인이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아이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도 합니다.”
―법이 바뀐 사례가 있다면요.
“2011년 ‘나영이의 부탁’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했어요.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였고, 아이들을 포함한 50만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전달했어요. 그해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됐고요. 2017년 ‘집다운 집으로’라는 캠페인도 좋았어요. 주거 빈곤 아동을 위한 캠페인이었어요. 비닐하우스 등 열악한 환경에 사는 아이들이 전체 아동의 9%에 달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캠페인이었어요. 기업 후원을 받아 아이들의 주거 환경을 고쳐주는 사업을 했습니다. 이 캠페인도 법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고요. 2019년 정부가 발표한 주거 대책에 ‘아동 주거권 보장’ 항목을 포함시켰어요.”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두 개의 큰 줄기가 있어요. 아이들을 위해 당장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죠. 지금 해결해야 하는 건 아동 성폭력을 포함한 아동 학대 문제예요. 장기적인 관점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건 기후변화와 초저출생 문제입니다.”
―초저출생 문제요?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0년 기준 0.84명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하위죠.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경제활동을 담당할 청년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그 사회의 짐을 우리 아이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게 마음이 무거워요.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출산율, 아이들의 안전과 행복, 아동 학대. 이런 게 다 연결돼 있다고 봐요.”
블록체인과 디지털 전환
이제훈 회장은 기자 출신이다. 언론사에서 38년 근무했고, 대기업에서 4년간 일했다. 재단 회장을 맡은 건 2010년 8월부터다. 취임 당시 12만6000명이던 정기 후원자 수는 2021년 현재 약 52만명으로 5배 가까이로 늘었다. 600억원 규모였던 연간 후원금도 지난해 기준 1793억원으로 대폭 성장했다.
―취임 이후 10년간 재단의 규모가 몰라보게 커졌습니다. 비결이 있겠지요.
“처음 재단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정부의 위탁 사업을 끊어내는 거였어요. 오랜 기간 정부의 사업을 맡아서 하다 보니 정부 의존적인 면이 있었어요. 의뢰를 받아 하는 사업은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한 목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하려면 스스로 ‘어젠다’를 정하고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부 지원을 받는 쉬운 길을 버리고 후원자를 늘리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반발도 있었을 텐데요.
“방향을 잡고, 비전을 보여주고, 그 비전을 직원들에게 설득하는 게 CEO의 일입니다. 정부의 위탁 사업이라는 게 결국은 빈곤 아동을 돕는 게 대부분인데, 나라 경제가 좋아질수록 복지가 잘 갖춰질 거고 결국은 사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습니다. 의구심을 갖던 직원들도 재단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후원금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아무리 좋은 단체라 해도 성장하지 못하면 직원들이 신나지 않거든요.”
‘아동옹호 대표기관’이라는 재단의 정체성도 확립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동복지연구소’를 설립했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떤 게 고통스러운지 정확하게 알아내서 사업에 반영할 수 있게 했어요. ‘아동옹호센터’도 세웠습니다. 차별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모든 어린이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에요. 전국에 8곳이 있습니다. 다른 NGO에는 없는 특수한 조직이죠.”
재단의 분위기가 한 번 더 바뀐다. 올 하반기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는 등 디지털 경영을 본격화한다. 후원금이 어떻게 흘러 들어와 어떻게 쓰이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늘 두 개의 질문이 떠다닙니다. 재단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자문자답하며 11년간 재단을 이끌었습니다. ‘재단의 존재 이유는 아이들이다. 재단이 성장하는 건 후원자들 덕분이다. 잘하자. 그리고 투명하게 하자.’ 그 외의 어떤 사심도 없습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