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는 ‘n번방’ 못 막는 건가 안 막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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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n번방, IT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미성년자 등 여성 대상 성 착취 영상물을 채팅방에서 유포한 일명 ‘n번방 사건’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악(惡)의 온상으로 지목된 해외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은 한국 경찰의 수사 협조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성난 국내 이용자들이 ‘탈퇴 총공(격)’을 펼쳐도 반응이 없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텔레그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고 있다. 뛰어난 보안성을 내세우며 수많은 가입자를 불러 모았지만, 지금은 그 기술이 성범죄와 테러, 마약·무기 밀매 등에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는 텔레그램을 넘어 IT 업계 전반으로 향하고 있다. 메신저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카페와 블로그 등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카카오, 네이버, 페이스북 등 거대 IT 기업이 이런 문제들을 인지하면서도 사실상 방치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n번방 사건의 주동자와 공모자뿐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를 방조한 IT 기업에도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여전한 n번방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모르는 아저씨가 자기 몸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요. 신고하기를 누르려다 실수로 채팅방에서 나와버렸어요. 증거를 못 남겼는데 어떡하죠?”

“라인 채팅방에서 대화하던 남자가 만나자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네 얼굴 캡처했고 신상 다 털었다. 나체 사진에 합성해 주변에 뿌리겠다’고 협박해요. 너무 무서워요.”

십대여성인권센터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이런 상담이 들어온다. 지난해 센터로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상담 건수는 4200여건. n번방 사건 이후에도 상담 건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텔레그램 관련 상담만 전보다 줄었을 뿐, 전체 건수는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 2012년부터 메신저·SNS·채팅앱 등에서 이뤄지는 성범죄를 모니터링해온 십대여성인권센터 측은 n번방 사건이 텔레그램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내 이용자 수가 4500만명에 이르는 ‘카카오톡’을 비롯해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가 제공하는 ‘라인’ 등에서도 이런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해당 기업들도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면서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안에 무수한 n번방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안일한 모습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직 IT 업계 관계자들의 협조를 받아 카카오톡, 라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4개 플랫폼의 ‘디지털 성범죄 안전망’을 점검해봤다.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플랫폼이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할 기능을 9가지로 추린 뒤 도입 여부를 ‘○×’로 체크했다. 업계 관계자들이 꼽은 필수 항목은 ▲사진·영상 공유의 위험성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공 ▲선정적인 사진·영상을 신고하는 기능 ▲신고된 사진·영상의 추가 공유를 막는 시스템 ▲대화 도중 상대방을 신고하는 기능 ▲대화창에서 스크린샷 등으로 증거를 확보하는 기능 ▲모르는 사람의 메시지는 ‘수신거부’ 되도록 기본 설정 ▲친구 정보는 ‘비공개’로 기본 설정 ▲사용자 프로필은 ‘비공개’로 기본 설정 ▲나이를 속인 사용자에 대한 제재나 관리 등이었다.

점검 결과 4개 플랫폼 모두 기업들의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로 디지털 성범죄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주요 메신저·SNS의 디지털 성범죄 안전망 점검’ 표 참조〉.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은 ‘×’ 6개와 ‘△’ 2개, ‘○’ 1개를 받았다. ‘사진·영상을 신고하는 기능’과 ‘대화 상대방을 신고하는 기능’의 경우 기본채팅방에서는 안 되고 오픈채팅방에서만 작동하는 구조라 ‘△’를 받았다. 카카오톡 이용자들은 ‘신고하기’ 기능과 관련해 여러 불편을 겪고 있었다. 대화 도중 신고하기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대화방 나가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미리 대화 내용을 캡처해두지 않은 경우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라인은 ‘×’ 7개와 ‘○’ 2개를 받았다. 라인에서는 휴대폰 인증 없이 아이디만 만들면 채팅방을 이용할 수 있어 가해자가 자신을 숨긴 채 상대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나란히 ‘×’ 5개와 ‘○’ 4개를 받았는데 개인 정보 유출 가능성이 높다는 게 취약점으로 지목됐다. 프로필이나 게시물 공개에 대한 디폴트 값이 ‘전체공개’로 설정돼 있어 가족이나 친구관계, 주소 등의 정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출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진경 대표는 “기업의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기능들인데, n번방 사건 이후에도 개선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못하나 안 하나

최소한의 안전망도 갖추지 못한 이 플랫폼들에서는 여전히 성 착취 영상물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은 성범죄자들 사이에선 꽤 ‘안전한 공간’으로 통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미 수년째 익명성에 기댄 간악한 디지털 성범죄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픈채팅방을 통해 성 착취 영상물을 유포하고 거래한 ‘빨간방 사건’이 대표적이다. 문제가 커지자 지난해 정부가 단속에 나섰지만 이름과 형태만 조금씩 바뀔 뿐 빨간방은 지금도 성행 중이다.

최근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오픈채팅방에서 미성년자 성 착취 영상물을 유포하는 정황을 포착해 수사기관에 자료를 넘겼다. 센터로부터 제공받은 대화방 캡처본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청소년이 등장하는 성 착취 영상물이 거리낌없이 공유되고 있었다. “텔레그램 n번방 난리 났던데 여기도 난리남?” “이 방은 7년째 운영 중” “카카오톡에서 (영상물) 뿌린 건 2개월 정지밖에 안 먹음”이라며 서로를 안심(?)시키는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카카오 측에 대응 방안을 물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 담당자는 “성매매, 조건만남 등 유해 단어에 대한 금칙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채팅방을 단속하고 있다”면서 “또 불법 콘텐츠 유통을 관리하기 위해 상시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성범죄 예방 전문가들은 ‘실효성 없는 대응’이라고 평가했다. 김보람 십대여성인권센터 활동가는 “채팅방을 제대로 단속하려면 금칙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과연 얼마나 자주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우리 센터에서 모니터링해도 금방 적발할 수 있는데 카카오가 못한다면 그건 ‘열심히 안 하거나’ ‘적발하고도 문제가 커질까 봐 쉬쉬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IT 업계 내에서도 카카오톡 오픈채팅 제재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개발자는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변종 채팅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회사에서도 잘고 있을 것”이라며 “n번방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는 상황에서도 다른 방법을 고민하지 않고 원칙적으로만 대응하고 있으니 아쉽다”고 했다. 또 다른 현업 관계자는 “기업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텔레그램에서처럼 사건이 크게 터져서 카카오톡 탈퇴 운동이라도 벌어지면 그때는 좀 적극적으로 나설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IT 기업의 사회적 책임

n번방 사건으로 제기된 ‘IT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은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분야의 새로운 어젠다로 떠오르고 있다. 김도영 CSR포럼 대표는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고도화된 기술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법이나 체계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n번방 사건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정부나 기업, 개인이 ‘각자’ 책임을 다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이제는 ‘같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김도영 대표는 “IT 기업들은 ‘확장된 책임 의식’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결국 비용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비용을 감내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공동체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오 한국사회투자책임포럼 사무국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그 기업의 업(業)으로 완성된다”면서 “금융회사는 ‘바른 투자’로, IT 기업은 ‘기술’로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진정한 임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IT 기업은 뛰어난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서비스를 만들었고 큰돈을 벌었지만, 그 기술에 따라오는 부작용에 대해 돌아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면서 “디지털 성범죄를 ‘방어’하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게 IT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했다.

조진경 대표는 IT기업에 ‘성 착취 피해 보호 프로세스 도입’을 제안했다. ▲유해 사용자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면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차단 등의 조치를 취할 것 ▲신고자가 보낸 증거 문서나 사진을 서버에 일정 기간 보관하고,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신고자의 동의를 받아 전달할 것 ▲피해를 겪은 신고자가 법률·심리·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도울 것 ▲신고 이후의 처리 절차를 안내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그는 “악의를 품은 개인이 저지르는 디지털 성범죄를 완벽하게 막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도 “정부가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들이 기술적인 방어를 해준다면 n번방 사건과 같은 최악의 성범죄는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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