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7일(금)

‘인구 10만’ 소도시 완주는 어떻게 사회적경제 리더가 됐을까?

로컬푸드 1번지
직매장 12곳… 지역 농산물 모두 지역서 소비
농산물·가공식품 생산하는 ‘마을회사’ 111개
농가 소득 2배 이상 늘고, 소비자가격 30% 낮춰
농가레스토랑과 유·초·중·고교 급식도 연계

民官 명확한 역할 분담
중간지원조직은 조직 발굴·사업 연계 등 실무
郡은 예산 지원·인프라 구축 등 든든한 뒷받침
인구 유입 효과 불러… 지난해 2697가구 귀촌

완주군이 꿈꾸는 내일
100여 명 구성 ‘소셜굿즈 태스크포스’ 출범
농산물뿐 아니라 공산품까지 품목 확대할 것

한국의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도시가 있다. 인구 9만4000명의 소도시 전북 완주다. 협동조합·사회적기업·마을회사·마을공동체·중간지원조직 등 완주군 안에만 400개가 넘는 사회적경제 조직이 존재한다. 현재 전체 군민의 약 10%에 해당하는 9000여 명이 사회적경제 조직에 몸담고 있다. 완주의 사회적경제는 ‘로컬푸드’ 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톱니바퀴처럼 촘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다. 지난 10여 년간 지자체와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뿌리 사회적경제 조직을 발굴·육성한 결과다. 양평·세종 등 다른 도시에서도 완주 모델을 가져다 쓸 정도로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전북 완주로컬푸드 직매장 혁신점에 완주군청, 중간지원조직, 협동조합, 마을 회사 구성원들이 모였다. 350개 품목의 로컬푸드를 판매하는 혁신점은 지난해에만 47억8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완주=한준호 C영상미디어 기자

◇완주 사회적경제의 중심 ‘로컬푸드’

“아침에 수확한 채소를 저렴하게 사서 저녁에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지난 20일 완주 로컬푸드 직매장 혁신점에서 만난 주부 김성미(46)씨의 장바구니에는 배추·양파 등 농산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씨는 “대형마트에서 이만큼 사면 3만원은 줘야 하는데, 여기는 2만원이면 된다”며 “주민들이 정직하게 키웠다니 믿고 먹는다”고 말했다.

완주는 ‘로컬푸드 1번지’로 불린다. ‘지역에서 난 농산물은 지역에서 모두 소비한다’는 로컬푸드 개념을 2012년 국내에 처음 들여와 전국에 퍼뜨렸다. 세계적으로도 성공 모델로 꼽힌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해 완주를 로컬푸드 정책 우수 사례로 선정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사회적 농업정책을 펼쳐 여러 가지 혁신을 낳았다. 소규모 농가에 지속가능한 생계를 보장했고, 로컬푸드와 관련한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수백개 생겨나 지역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완주에는 로컬푸드 직매장이 모두 12곳 있다. 지난해 거둔 매출만 608억원에 달한다. 판매 품목은 모두 지역 농가에서 공급받는다. 경작 면적이 1㏊(1만㎢) 미만인 소농(小農) 5800여 곳 가운데 2500개 농가(43%)가 참여한다. 용진읍에 첫 직매장이 들어선 2012년과 비교해 참여 농가는 8배, 매출은 11배나 뛰었다.

완주 로컬푸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끼어드는 중간 유통망이 없다. 협동조합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중개한다. 매일 새벽 농가가 농산물을 가져오면 협동조합은 이를 대신 판매하고 운영비·인건비 등 명목으로 10%의 수수료만 받는다. 매대에는 토양·농업용수·잔류농약 등 검사를 해 농산물우수관리제도(GAP) 인증 기준을 만족한 농산물만 올라간다. 농가는 기존 유통망을 이용하는 것보다 소득이 두 배 이상 높아지고, 소비자는 30% 정도 싼 가격에 안전한 먹을거리를 살 수 있으니 모두에게 이득이다.

완주의 사회적경제 조직 가운데 250여 곳이 로컬푸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마을 회사는 직매장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마을 전체 가구의 50% 이상이 참여하는 영농법인·농업회사법인 형태의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구성원은 공동으로 농산물·가공식품을 만들고 수익을 나눠 갖는다. 순수익의 20%는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사업에 재투자된다. 현재 한과를 만드는 서계마을, 두부를 만드는 원용복마을 등 111개 마을회사가 운영 중이다.

두레농장은 로컬푸드와 연계된 완주의 복지 모델이다. 농장은 협동조합·마을공동체 등이 군청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데, 노인·장애인·이주여성 등 취약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완주에 흩어져 있는 두레농장은 모두 10곳으로, 생산된 농산물은 로컬푸드 직매장으로 유통된다. 이 밖에 가공식품영농조합 50여 개, 마을회사 이전 단계의 마을공동체 100여 개 등이 로컬푸드와 관련이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

완주의 지역 소식을 전달하는 월간지 ‘완두콩’을 발행하는 완두콩협동조합도 로컬푸드와 무관하지 않다. 조합의 연간 매출은 3억원대. 이용규 대표는 “잡지로는 적자를 보고 있지만 로컬푸드 관련 홍보·출판·인쇄 업무로 수익을 내고 있다”면서 “혼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지역 청년 5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할 정도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완주 내 2500여 개 농가는 매일 새벽 완주 각지에 있는 12개 직매장에 수확한 농산물·가공식품을 납품한다. ⓒ완주군

사회적경제 성장 비결은 민관의 신뢰

완주 로컬푸드는 민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성공시킨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대표 사례다. 완주는 지난 2009년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핵심 목표로 설정하고 전국 시·군·구 가운데 최초로 ‘사회적경제 육성 조례’를 만들었다. 예산과 조직 등 법적 근거를 명시한 조례에는 중간지원조직의 설치·운영 조항도 담겼다.

강평석 완주군 사회적경제과장은 “사람이 자주 바뀌는 탓에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공무원 조직만으로는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기 어렵다고 여겼다”며 “행정과 주민 사이의 다리가 돼 줄 중간지원조직을 만드는 작업부터 착수했다”고 말했다.

완주는 철저하게 외부인의 시선에서 지역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판단하는 방식을 택했다. 희망제작소에 의뢰해 연구원들이 완주에서 2009년부터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사회적경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원했다. 연구원들은 완주군의 291개 마을을 전수조사해 A부터 E까지 다섯 등급으로 분류하고 사업성이 있는 445개 지역 자원을 도출했다. 이 데이터를 근거로 5년간 예산 500억원을 투입하는 마을공동체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2010년에는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중간지원조직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현재의 완주공동체지원센터)가 설립됐다. 서울시에서 처음 만들어진 중간조직인 서울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문을 연 시기가 2012년이니, 완주군이 2년 앞선 셈이다.

완주군과 중간지원조직이 명확하게 역할을 분담해 움직였다. 중간지원조직은 사회적경제 조직 발굴과 교육, 정부 사업 연계, 네트워크 형성 등 실무를 맡고 완주군은 예산 지원, 인프라 구축, 제도 정비 등으로 뒷받침하는 식이다. 개별 농가에서 사용료만 내고 공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로컬푸드 가공센터’ 설립도 완주군과 중간지원조직의 협업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현재 완주 고산면과 구이면에 설립된 가공센터 두곳에서 청국장, 빵 등 지역 농산물로 만든 가공식품이 생산되고 있다.

사회적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완주 지역으로 귀농·귀촌하는 인구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487가구에 그쳤던 귀농·귀촌 가구가 2013년 한 해에만 530가구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2697가구나 귀농·귀촌했는데 39세 미만 청년 가구가 30%(816가구)에 달했다. 발달장애인 재활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 ‘이랑’의 최대희 대표는 “완주는 사회적 기업가에게 매우 친화적인 도시”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특수교육 전공을 살려 소셜벤처를 하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사업으로 연결할 길이 막막했다. 무작정 완주군청에 찾아가 사업계획서를 냈는데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초기 지원금과 사무실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중간지원조직은 협동조합, 예비사회적기업을 거쳐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도록 지원해 줘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이근석 완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센터장은 “사회적경제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못 내리고는 민관이 얼마나 서로 신뢰를 구축했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행정이 예산을 무기 삼아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이면 민간은 의욕을 잃는다. 반대로 민간이 행정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행정은 협력을 거부하게 된다. 완주군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민간과 행정이 신뢰를 두텁게 쌓은 덕분에 효율성이 높다”고 말했다.

완주군은 이제 로컬푸드 1번지를 넘어 ‘사회적경제 대표 도시’를 꿈꾼다. 지난 3월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 학자, 군민 등 100여 명으로 구성된 ‘소셜굿즈(social goods) 태스크포스’를 출범하고 2025년까지 전체 군민의 30%를 사회적경제에 참여시키고, 300개의 협동조합·사회적기업·소셜벤처를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소셜굿즈 태스크포스 자문위원인 정천섭 농림축산식품부 먹거리순환체계구축사업단 민간단장은 “소셜굿즈에는 농산물뿐 아니라 다양한 공산품이 포함된다”면서 “로컬푸드의 유통망을 바탕으로 사회적경제 조직들의 역량을 집중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순환 경제를 완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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