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도시재생, 길을 묻다] ‘문학·역사·철학’ 뿌리내리니…지역경제 꽃바람 불다

[도시재생, 길을 묻다] ③도시, 인문학과의 만남

건축가 승효상(67)은 도시재생을 ‘침술’로 표현한다. 그는 저서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에서 “외과 수술하듯 도시 전체를 바꾸는 마스터플랜보다 주변에 영향을 줘 전체적인 변화를 이끄는 도시 침술이 더 유용하다”고 썼다. 문제는 쇠퇴하는 도시들의 증상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이에 따른 처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해법으로 ‘문사철(문학·역사·철학)’로 대표되는 인문학을 제시한다. 도시재생을 할 때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지역에 오랫동안 축적된 인문학적 가치를 발굴해 이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열린 부천 북페스티벌에 참여한 한 주민이 도심을 묘사한 캔버스를 채우는 모습. ⓒ부천시

文學이 흐르는 골목

부천은 지난 2017년 동아시아 최초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될 만큼 문인들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인 정지용(1902~1950)이 대표적이다. 그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거처를 부천으로 옮겨 생활했다. 부천 최초의 교당인 소사성당은 정지용 시인이 손수 벽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양귀자의 ‘원미동사람들’은 부천시 원미동에 사는 소시민의 다양한 일상을 11개 단편으로 담아낸 연작소설이다.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1892~1973)은 1967년 부천에 복지 시설 소사희망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보기도 했다.

부천시는 지난해 지역 문인들의 발자취를 담은 ‘부천문학지도’를 제작해 이를 도시재생 사업의 자료로 활용하기로 했다. 정찬호 부천마을재생지원센터장은 “올해는 소사본동에 1㎞ 남짓한 산책로를 정지용 시인을 테마로 정비하고, 펄벅기념관이 있는 심곡본동에는 펄 벅 여사의 유산을 연계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문학을 테마로 도시의 문화 자산을 확보해 나가면 자연스레 유동 인구가 증가하고 지역 상권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역사’는 도시재생 사업의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지만, 접근이 쉬운 만큼 실패할 확률도 높다. 이길영 군산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은 “역사를 테마로 도시재생을 하는 경우 대부분 박물관이나 전시관, 기념관부터 짓는 경우가 많다”면서 “부지 매입비와 건축비로 수십억원을 쓰는 건 도시재생의 취지에 전혀 안 맞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도시재생의 핵심은 주거 복지와 지역 경제 향상인데,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이런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역사 문화 콘텐츠로 도시재생에 성공한 사례는 해외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스페인 남부의 작은 도시 ‘코르도바’다. 이곳엔 로마, 이슬람, 기독교 문화가 융합된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건축 양식의 변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갖가지 골목 축제가 열린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 중 한 곳인 가나자와시 역시 에도시대 역사를 도심에 그대로 살려내는 방법으로 지역 경제를 되살릴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역사를 활용해 주거 복지와 지역 경제를 동시에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도시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주역 앞 ‘첫마중길’ 조성 전(왼쪽)과 현재 모습. ⓒ전주시

‘느림의 미학’으로 지역에 활력을

느림의 가치를 추구하는 ‘슬로시티’는 지난 2007년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이탈리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는 전통과 자연을 보전하고 느림의 미학이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국제 운동의 한 형태다. 현재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인증을 받은 국내 슬로시티는 13곳으로, 작은 면 단위의 낙후 지역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전주시’는 예외다. 지난 2010년 전주시는 ‘전주 한옥마을’ 구역에 대해 슬로시티 인증을 받아냈고, 2016년에는 인증 영역을 도시 전역으로 확대해 재인증을 받았다. 전주시의 인구는 현재 65만명으로, 전 세계 슬로시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주시의 느림의 미학은 도시재생 사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지난해 공사를 마친 전주역 앞 ‘첫마중길’이 대표적이다. 첫마중길은 전주역에 도착한 관광객이 가장 먼저 발을 딛는 백제대로 전주역~명주골사거리 구간(길이 850m)이다. 전주시는 이 길을 기존 왕복 8차선에서 6차선으로 줄이고, 직선 도로를 곡선으로 변경했다. 차선을 줄인 공간에는 기증받은 나무를 심어 보행 광장을 조성했다. 김칠현 전주시 도시재생과 도심활성화팀장은 “첫마중길은 2000년대 들어 공공기관이 서부신시가지로 빠져나가면서 상권이 빠르게 쇠퇴한 곳”이라며 “자동차보다는 사람, 콘크리트보다는 생태, 직선보다는 곡선을 지향하는 전주시의 철학이 반영된 도시재생 사업 이후 역세권 상권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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