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9일(화)
강릉의 핫 플레이스 ‘서부시장’을 아시나요?

서부시장 지역재생사업 3년의 임팩트

현대차그룹·지자체 등 힘 모아
내부 리모델링, 청년 공간 조성
공연·자동차 극장·마켓 등 열어
시장 주변 상권 점점 활기 찾아

“서울에서 친구랑 여행 왔는데 강릉 사는 지인이 꼭 서부시장에 가보라고 해서 들렀어요. 타로점도 보고 가방도 샀어요. 자체 기획한 제품이랑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오래 구경하다가 가요.”(김도연·24)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에요. 판매자들도 친절하고, 젊은 분위기가 좋아서 계속 오게 돼요. 강릉에 살면서도 주말에 아이들이랑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아쉬웠는데 여긴 볼 것도 먹을 것도 참 많아서 좋아요.”(조옥주·40)

강원 강릉 용강동에 있는 45년 된 ‘서부시장’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구도심 한가운데 삼각형으로 지어진 독특한 건물. 그곳 1~2층 서부시장을 사람들이 다시 찾기 시작했다. 지난달 25~26일 열린 서부시장 ‘CCC 페스타’에는 1100여 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다녀갔다. 래퍼 윤비가 공연을 하고, 먹을거리와 잡화를 파는 마켓도 열렸다.

지난달 25일 강원 강릉 서부시장 2층에서 열린 'CCC 페스타'에서 래퍼 윤비(YunB)가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장 옆에서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잡화, 의류 등을 파는 마켓이 열렸다. /강릉=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달 25일 강원 강릉 서부시장 2층에서 열린 ‘CCC 페스타’에서 래퍼 윤비(YunB)가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장 옆에서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잡화, 의류 등을 파는 마켓이 열렸다. /강릉=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팝콘 대신 감자전 먹는 ‘힙’한 극장

불과 2년 전만 해도 서부시장은 사람들이 잊은 곳이었다. 한때는 북적이던 시내 중심지였지만 구도심이 쇠퇴하고 강릉 인구가 감소하면서 활력을 잃어갔다. 2020년 4월 현대자동차그룹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2014), 광주 청춘발산마을(2015)에 이어 강릉 서부시장을 세 번째 ‘지역재생 지원사업’ 지역으로 선정했다. 현대차는 강릉시, 사회적기업 공공미술프리즘과 손잡고 시장 안을 리모델링해 청년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유다희 공공미술프리즘 대표는 “환경을 정비하고 청년을 몰아넣는 ‘점포’ 위주 지역재생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 주민과 정보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마켓’ 방식 지역재생을 택했다”면서 “서부시장이 지속 가능하려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물건만 사서 나가는 게 아니라 머물면서 시간을 보내고 교류하는 시장으로서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서부시장에서 열리는 ‘CCC 페스타’도 그런 취지를 담은 행사다. 지난 25일 CCC 페스타 현장에서 만난 서부시장 상인 이보영(58)씨는 “2년 전까지는 지금 같은 시장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1층 생선 가게랑 노점상 정도만 겨우 운영되고 있었어요. 사실상 시장 기능을 잃어버렸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 재생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 상인들도 갸우뚱했어요. ‘도대체 여기서 뭘 한다는 거야? 한다고 될까?’ 하고요.”

1977년 개설돼 성황을 누리던 서부시장이 쇠락의 길을 걸은 건 2001년 용강동 근처 명주동에 있던 강릉시청이 홍제동으로 이전한 뒤부터다. 2002년, 2003년에는 연달아 시장에서 불이 나면서 방문객이 급감했다. 대형 마트와 기업형 수퍼마켓의 등장도 서부시장의 쇠퇴를 부추겼다. 상인들이 빠져나갔고 대다수 공간이 창고나 향우회·동창회 사무실, 심지어 도박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서부시장 상인과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이 지역재생 사업 첫해 과제였다. 현대차와 공공미술프리즘, 강릉시는 사업설명회와 떡 나눔 행사를 하면서 교류를 확대했다. 오랜 시간 시장을 지켜온 이들과 소통하며 동의를 구했다. 함께 식사하면서 친해지는 ‘밥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상인과 서부시장 활동가들이 모여 밥을 먹는 ‘브런치 프라이’를 열기도 했다. 사업이 끝난 뒤에도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 개발에 따른 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릉시와 상가 임대인들이 7년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는 협약도 맺었다.

2년 차부터는 ‘브랜딩’에 집중했다. 본격적으로 시장 콘텐츠를 개발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인큐베이팅했다. 서부시장을 강릉의 ‘문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도 이어갔다. 팝콘 대신 서부시장의 명물인 감자전과 메밀전을 먹으면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자동차 극장’ 이벤트를 시장 주차장에서 열기도 했다. 매월 주제를 바꿔가며 열리는 ‘CCC 페스타’에서는 전시·공연·플리마켓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서부시장 주변의 상권도 점점 살아나고 있다. 재생사업을 시작한 이후 네일숍, 카페, 레스토랑, 미술관 등 시장 주변으로 다양한 공간이 문을 열었다.

지난달 25일 'CCC 페스타' 플리마켓에서 청년들이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CCC 페스타’ 플리마켓에서 청년들이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MZ가 브랜딩한 강릉 서부시장

현대차와 공공미술프리즘은 수십년간 시장을 지켜온 방앗간, 국밥집, 생선 가게 등 서부시장의 유산을 이어가는 방법도 함께 고민했다.

청년들에게 시장 상인들의 제품을 새롭게 브랜딩하고 마케팅을 할 수 있게 했다. 28년 동안 운영한 ‘정원기름집’의 들기름과 깨소금은 청년 디자이너 손에서 ‘신혼부부 집들이 선물 패키지’로 재탄생했다. 신혼의 고소함을 담았다는 의미다. 10년 넘게 한자리에서 만두를 빚은 최정길(78) 할머니의 ‘용강손만두’는 젊은 세대 입맛과 편의에 맞는 밀키트로 제작됐다. 강릉에서 활동하는 작가 7명이 모여 상가의 추억과 이야기를 담은 달력과 그림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 춘천·원주 등으로 나가야만 했던 강릉 출신 청년들에게는 서부시장 재생사업이 새로운 기회가 됐다. 용강손만두 밀키트를 개발한 우종희(35)씨는 서울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총괄 매니저로 근무하다가 결혼 후 강릉에 정착했다. 강릉에서 경력을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지역 특산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얼마 전에는 서부시장에 ‘일일가정식’이라는 가게를 열었다. “강릉 특산물로 반찬을 만들어 팔고, 쿠킹클래스도 운영해요. 밀키트도 개발하고요. 얼마 전에는 출산을 했어요. 이제 서부시장에 아기랑 같이 출근하려고요(웃음).”

강릉의 ‘핫 플레이스’라는 별명답게 서부시장에는 공유 공방, 전시 공간, 스튜디오, 미술 작업실 등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다. 강릉시는 비어있던 2층 공간을 매입해 청년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다. 타지에서 살다가 강릉으로 이주해온 청년들도 이곳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서부시장 2층에 작업실을 꾸린 조명 디자이너 제이 마커스(35)는 태권도가 좋아 미국 뉴욕에서 한국으로 왔다. 강릉에서 서핑 강사로 일하다가 바다에 떠다니는 폐어망을 보고 해양 쓰레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눈에 띄는 어망을 주워다 서부시장 작업실에서 조명을 만들고 전시도 한다. 미술 작가 임수정(29)씨는 주문진 수산시장에서 나오는 게딱지를 소재화하는 연구를 서울대환경연구소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게딱지와 조개껍데기로 만든 미술 작품도 선보인다. “오랫동안 서울 혜화동에 살았어요. 예전엔 동네가 한적하고 깨끗했는데 개발이 되면서 회색빛으로 변해버렸어요. 회의감이 들었죠. 2년 전 강릉의 자연이 너무 좋아서 와서 살기로 했어요. 그러다 보니 환경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플리마켓에 나온 머랭쿠키.
플리마켓에 나온 머랭쿠키.

마을 ‘잠재력’, 지자체 ‘의지’, 기업 ‘지원’ 더해지니…

이병훈 현대차 상무는 “다양한 불평등 이슈가 결국은 ‘지역 격차’에서 비롯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지역재생 사업을 시작했다”면서 “강릉을 세 번째 지역재생 사업지로 결정한 이유는 잠재력이 크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교통이 좋고 서울·수도권의 트렌드에 대한 수용성도 뛰어나 사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서부시장은 강릉역·버스터미널과도 멀지 않아 관광객 유입 가능성이 크고, 상인들의 시장 활성화에 대한 의지도 높았다. 이병훈 상무는 “강릉 서부시장은 지역의 잠재력, 지자체(강릉시)의 개발 의지, 기업(현대차)의 지원이 맞물려 시너지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가 2015년부터 4년간 진행한 광주 청춘발산마을 사업은 또 다른 문제의식과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당시 현대차가 광주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지원하게 되면서 지역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고민한 결과였다. 발산마을 사업은 청년이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마을을 구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됐다. 청년사업팀을 입주시켜 마을 공동화를 막고, 청년을 마을 발전의 주체로 참여시켰다. 또 마을을 예쁘게 꾸미는 ‘컬러아트 프로젝트’ 등을 통해 발산마을을 지역 명소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업 후 발산마을의 월평균 방문객은 6000명 안팎으로 사업 전에 비해 40배 늘었고, 마을 주택 공실률은 36% 감소했다.

오는 10월에는 서부시장의 지역 재생사업 성과를 공유하고 시장의 공식적인 재출범을 선포하는 행사를 연다. 이병훈 상무는 “서부시장 지역 재생사업 3년 차 목표는 현대차의 후원이 없어도 지역 상권이 자생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서 새로운 재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릉=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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