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명의 체인지메이커가 한 공간에 모였다. 사회적기업가 혹은 사회혁신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새로운 업무 공간은 지난 13일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연 헤이그라운드. 약 6000㎡(1800평), 지상 8층, 지하 1층 신축 건물의 공유 사무실이자 코워킹 커뮤니티(Co-working Community)다. 공간 기획부터 오픈까지 꼬박 3년 반이 걸렸다. 이미 2층부터 5층 프라이빗 오피스 공간(10~60인 규모 성장기 법인 대상)은 빈자리가 없다. 헤이그라운드를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루트임팩트가 지난 2년간 잠재 입주사를 모집한 덕분이다. 40여개 기업이 헤이그라운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40여개 기업들이 헤이그라운드에 둥지를 튼 이유는?
현재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기업은 총 43곳. 교육·보육부터 문화·예술, 환경·에너지, 건강·여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영유아 교육분야 앱 세계시장을 휩쓴 ‘토도수학’(장애 혹은 학습부적응 아동을 위한 학습도구) 어플 제작사인 에누마(Enuma), 소액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는 온라인 임팩트투자 플랫폼 루트에너지, 블루투스 4.0 비컨 기술을 이용해 미아 방지 서비스를 개발한 회사 리니어블 등이 대표적이다.
사회혁신 기업가를 지원하는 글로벌 비영리 조직 아쇼카, 글로벌 임팩트 투자기관 디쓰리쥬빌리(D3Jubilee), 사회적기업·스타트업·비영리법인 등을 지원하는 법률사무소 유앤아이파트너스 등 중간지원 성격의 기업들도 주요 입주사다.
입주사는 어떻게 선정했을까. 먼저 루트임팩트가 기존에 관계를 맺고 있던 10여개 소셜벤처들을 1차 대상으로 정했다.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주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후 의도적으로 모르는 회사들을 입주 대상자로 삼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거나, 틀에 갇힌 사고로 판단 내리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1차 리스트가 완성되자, 이들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날 수 있는 업종이나 중간지원조직들을 2차로 배치했다. 헤이그라운드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최지훈 루트임팩트 매니저는 “스스로를 소셜벤처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미션이 중심이 된 스타트업도 포함시키고, 비영리 조직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헤이그라운드 멤버가 되려면, 프라이빗 오피스(2~7층)에 입주하거나 지정좌석(6~7층)을 이용하면 된다. 2~5층 공간은 10~100인 규모의 성장기 조직에게 적합하며, 월 멤버십 비용은 1인당 36만원(VAT 별도, 보증금은 월 멤버십의 8개월분). 6~7층 지정좌석의 월 멤버십 비용은 인당 24만원에서 30만원 수준이다(보증금은 월 멤버십의 2개월분). 단, 소셜 임팩트 기대 수준, 계약 기간 등을 고려해 비용 할인을 단계적으로 적용한다.
임대료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현재 10인실 독립 공간을 사용 중인 교육 관련 비영리단체 점프의 이의헌 대표는 “고정비가 고민이긴 했지만, 직원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우선순위였다”면서 “사업 특성상 행사가 많은 편인데 콘퍼런스 홀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야외 테라스도 저렴하게 대관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다”고 말했다. 멤버들은 회의실과 지하 콘퍼런스 공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법률·특허·재무회계·통번역 등 전문가 프로보노 그룹과 파트너십을 맺고 경영지원 프로그램도 연결해준다.
◇다양성과 자발적인 협업, 헤이그라운드가 바라는 커뮤니티
입주사 규모는 5명 이하의 소규모 스타트업부터 60여명이 일하는 회사까지 다양하다. 가장 큰 규모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제품과 콘텐츠를 제작하는 브랜드 마리몬드와 디자인·IT 솔루션 회사 슬로워크다. 두 곳 모두 60명가량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사무국장은 “한 층에 최대 100명 정도 사용할 수 있는데, 기업 한곳이 한개 층 전체를 사용하는 것은 지양한다”면서 “코워킹 사무공간의 취지를 살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오픈한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입주사들 간 협업도 벌써 진행되고 있다. 헤이그라운드 멤버들이 회의실 예약, 행사 공지 등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내부 어플은 슬로워크가 개발했다. 어플 안에 입주사 멤버들 간 메신저 기능도 있어 자유로운 네트워킹도 가능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만지는 시계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출시해 미국의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에서 60만달러 펀딩에 성공했던 이원(Eone)의 한국지부인 이원코리아도 마리몬드와 컬래버(협력) 상품을 기획하고 있다. 임동준 이원코리아 대표는 “대부분의 기업이 대표가 대외업무를 하고 직원들은 사무실에서만 일하다 보니 만남의 기회도 적고, 긍정적인 자극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전 사무실보다 공간을 줄여서 입주했지만 직원들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100%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체인지메이커 500여명의 코워킹 커뮤니티가 만들 임팩트는?
헤이그라운드의 건축주는 현대해상화재보험 자회사인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이다. 현대인베스트먼트는 2015년 중순 부동산개발 사모펀드를 조성, 부지 매입 비용, 건축설계 및 건축비 등을 부담해 건물을 완공했다. 총 건축비만 250억원이 들었다. 다만, 사회혁신가들을 위한 부동산개발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책임투자 펀드로 운용된다.
헤이그라운드 건물의 임차인은 루트임팩트와 소셜벤처 투자사 HG이니셔티브(이하 HGI), 글로벌 비영리 조직 아쇼카한국 세 곳이다. HGI가 카페 및 식당이 운영되는 1층 공간을, 루트임팩트가 2층부터 8층까지의 사무공간을, 아쇼카한국은 지하 1층의 책임 임차를 맡는 구조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사무국장은 “일반적으로 분양을 하면 건축주가 공실 관리를 직접 해야 하지만 루트임팩트가 중간 역할을 하면서 공실 리스크를 낮출 수 있었다”면서 “더불어 사회책임투자 펀드이니만큼 목표 수익률을 좀 더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조율했다”고 설명했다. 수익률을 극대화하려면 최대한 개별 사무용 공간을 많이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했겠지만, 헤이그라운드 2~3층과 4~5층, 6~7층에는 두 개 층을 터서 멤버들이 사용할 수 있는 복층형 공용 라운지를 조성했다.
이 때문에 헤이그라운드 곳곳에는 커뮤니티 멤버를 위한 세심한 설계가 돋보인다. 개별 회의실은 물론 전화 부스, 7층 중정(中庭)과 8층 스카이라운지와 옥상 등 멤버들의 휴식 공간, 제품 및 프로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촬영 스튜디오, ‘레이디스살롱(Lady’s salon)’이란 이름의 수유실, 자출족을 위한 자전거 주차공간. 예비입주사들과 6개월 동안 매월 미팅을 가진 결과다.
사전 미팅에서는 ‘커뮤니티란 무엇인가’, ‘소셜벤처의 성장 조건은 무엇인가’ 등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최지훈 루트임팩트 매니저는 “체인지메이커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사회적 지지를 충분히 못 받고 있었다”면서 “이들이 좋은 공간에서 즐겁게 일하면서 더 큰 사회 변화를 가지고 올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앞으로는 대기업, 프로보노, 정부·지자체, 투자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외부 제휴를 맺고 입주사의 성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이다. 체인지메이커들의 성장을 돕고, 국내 임팩트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헤이그라운드의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