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교사 한 명에 학생은 60여명. 변변찮은 환경에 깨끗한 교과서 한번 가져보지 못한 탄자니아 아이들 270명의 손에 태블릿 PC가 주어졌다. 태블릿 PC에 담긴 건 아이들의 기초 학습을 돕기 위한 어플리케이션(앱). 3주간, 하루 30분씩 태블릿 PC내 앱을 활용한 ‘최신식 스스로 학습’이 이뤄졌다. 효과는 어땠을까.
“하루 30분, 3주간 앱으로 놀았을 뿐인데도, 아이들이 이해가 부족했던 부분에서 유의미한 학습 성과가 나타났어요. 교사 수가 적고 교구가 부족해 학습 기회가 제한적인데다, 칠판에 적는 걸 따라 쓰는 정도의 딱딱한 교육이 이뤄지는 낙후된 곳이거든요. 이런 곳에 태블릿 PC 기반의 학습 교재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에누마(Enuma) 이수인(39∙사진) 대표의 말이다. 에누마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교육기업. 지난 2013년 6월, 에누마에서 내놓은 수학 학습 앱 ‘토도수학(Todo Math)’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서비스 1년 만에 다운로드 150만건을 기록했고, 중국, 미국 등 20개국 앱스토어 교육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 내 학교 1300곳에서는 토도수학을 학습 도구로 활용하고, 애플은 22개 국가 자사 매장 제품에 토도수학을 깔았다.
교육 분야에서 앱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셈. 그러나 지난 11월 5일 D3쥬빌리 주최로 제주에서 열린 ‘D3임팩트 나이츠’ 현장에서 만난 이수인(39) 에누마 대표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출신 국가, 사는 지역, 장애 유무, 부모나 교사의 도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기술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양질의 학습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앱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것. 탄자니아까지 날아간 것도, 에누마에서 준비하는 새로운 앱 ‘토도 스쿨(Todo School)’의 현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하드웨어’에만 집중했어요. 2008년 MIT에서 ‘아동 한 명당 컴퓨터 한대를 주자(one laptop for one child)’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던 적이 있어요. 한 대당 100달러가 안 되는 저렴한 컴퓨터를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면 교육 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국제기구나 각 국 정부도 여럿 동참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안됐어요. 현지 태양열로는 컴퓨터를 돌릴 정도가 안됐고,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기기 자체가 다루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죠. 하지만 무엇보다 하드웨어 문제를 넘어서서 마땅한 소프트웨어가 없었어요.”
2014년, 한 공모전이 이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계 최대규모의 비영리 벤처재단 ‘엑스프라이즈재단(X-PRIZE Foundation)’과 유네스코·유엔세계식량계획, 탄자니아 정부가 협력해 진행하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Global Learning X PRIZE)’가 바로 그것.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서는 ‘학교 교육 기회가 제한된 아이들이 기초적인 읽기, 쓰기, 셈을 학습할 수 있게 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으로 총 1500만 달러(약 180억원) 상금을 내걸었다. 엑스프라이즈재단은 ‘민간 달 탐사 우주선 개발’, ‘인공지능’ 등 큰 상금을 내걸고 경쟁을 통해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이들을 발굴해 온 곳. 지금껏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해답을 공모하던 이 곳에서 “태블릿 PC만 제공하면 아이들 스스로 학습이 가능한 앱” 개발을 과제로 내걸은 것이다. 이 대표는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저희 투자자 중에는 ‘상금 액수, 그 이상도 투자할 테니 이런 대회 참여하지 말고 앱을 계속 개발하라’는 분도 있어요. 저희는 세상에 ‘에누마’가 하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만들었던 ‘토도수학’ 앱은 ‘장애아동’이나 ‘수학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거든요. 그걸 확장시켜서, ‘교육 기회가 제한됐던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앱’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토도수학’을 만들어봤던 저희로서는 답을 알 것 같았고요.”
‘장애 아동도 배울 수 있는 앱’을 생각하면서 개발했던 앱, ‘토도수학’. 사실 그는 “어쩌다 창업가”가 됐다. 남들보다 세상에 일찍 나온 아이는 꼬박 두 달여를 인큐베이터에 머물렀다. ‘아이가 크면서 학습 장애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은 가슴 깊이 박혔다. 장애를 가진 누구라도 본인의 속도대로 학습할 수 있도록, 세계 최고의 어플리케이션(앱)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개발한 앱이 세계를 휩쓸었지만 이 대표는 “‘장애아동을 위한 앱’을 개발하고 나니, 또 다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정작 출시하고 나니, ‘토도스쿨’의 주요 고객층이 장애아동이라기 보다는 ‘선행학습을 시키고 싶은 엄마들’이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교육열 높은’ 부모를 두지 않은 아이들도 학습에 어려움을 겪어요. 미국 내 이민자 가정도 그렇고, 개발도상국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아이들 학습을 위해서도 ‘기술’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크고요.” 이 대표는 “‘토도수학’을 만들면서 숫자 개념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수 많은 사전단계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사전단계’란 무엇일까. 그는 “수학을 공부하려고 해도 기호와 소리를 연결시키고, 기호를 머릿속에서 처리하기 위해 반복적인 자극이 필요하다”며 “‘토도수학’을 통해, 앱으로도 그런 자극을 줘서 학습 준비를 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라고 했다.
“전 세계 2억5000만명이 문맹인데 그 중 1억9000명이 학교에 다녀요. 학교에 다니는데 왜 글을 못 배우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7살이 된다고 모두가 7살 커리큘럼을 소화할 준비가 되는 건 아닌 거죠. 미국 내 이민자 가정 아이들이나, 집이 가난한 아이들은 부유한 백인 아이들에 비해 뇌가 충분한 자극을 받지 못하는 환경인 거죠. 개발도상국 아이들은 훨씬 더 접근성이 낮고요. ‘토도수학’에서 속도가 더딘 장애아동을 생각하면서 넣었던 여러 자극과 촘촘한 장치들을 활용하면, 다른 분야 학습도 도울 수 있다고 봤어요.”
전 세계, 교육 기회가 제한된 환경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질 앱. 토도수학을 이어 이름은 ‘토도스쿨’이라 붙였다. ‘학교의 모든 것’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앱 자체가 작은 학교가 된다. PC화면에 로마자를 따라 쓰며 스와힐리어 글자를 배우기도 하고, 글자들을 연결시켜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붙여 문장도 만든다. 숫자를 배우고 더하기·빼기 같은 연산도 배운다. 알파벳 뮤직비디오에서부터 스와힐리어로 된 책까지, ‘기초학습의 모든 것’이 하나의 앱에 담겼다.
면밀한 현지화 과정도 거쳤다. ‘토도스쿨’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작은 아이콘 하나까지도 제품을 사용할 아이들 입장에서 고려됐다. ‘토도수학’에서 사용했던 알록달록한 캐릭터나 추상적인 문양 대신, 탄자니아 아이들이 주변 환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곤충이나 식물, 풍경으로 대체했다. 화면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만지면서 숫자를 세고, 나뭇잎을 따라 스와힐리어 알파벳을 그려보는 식이다. 이 대표는 “토도수학을 쓰는 층에 비해 태블릿이 익숙하지 않을 아이들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긴장을 풀고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도 훨씬 더 많이 집어넣었다”고 했다. 화면을 터치하면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누르는 느낌이 나도록, 세세한 부분까지도 고려해서 반영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흥미를 느껴 계속 만지작거리는 과정에서 학습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 그는 “커리큘럼이 돌아가게 프로그램을 짜면서도 친숙하고 재미있는 요소를 담기 위해서는 사용자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CTS(기술기반혁신) 프로그램 2차 수혜자로 선정되면서 탄자니아 현지 테스트도 지원 받았다. 굿네이버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난 11월 3주간에 걸쳐 두 개 지역에서 현지 효과성 테스트도 진행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 대표는 “아이들이 태블릿 기반 학습을 굉장히 즐거워하면서 많은 문제를 풀고, 다양한 환경에서 양질의 학습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며 “아이들의 학습 몰입도나 출석율도 높고, 아이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빠르게 배우기도 하고, 게임 규칙도 쉽게 익혀나갔다”고 했다. ‘토도수학’으로 검증했던 커리큘럼에, 현지 아이들에게 익숙하도록 면밀하게 현지화를 한 것이 더해져 가능했던 결과. 내년에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 커뮤니티나 난민 수용소 등에서도 실험을 이어갈 예정이다. 학교 공간을 벗어난 곳에서도 ‘아이들의 스스로 학습이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에누마의 ‘토도스쿨’ 앱] 탄자니아 테스트 풍경을 담은 영상
내년 1월, 에누마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Global Learning X PRIZE)’에 최종 제품을 출품한다. 내년 3월, 준결승 진출팀이 확정된다. 4~5월간 파일럿 테스트를 거친 뒤 7월에는 최종 결승 진출팀이 결정되고, 이후 2년간의 현장 테스트 이후 2019년 4월 최종 우승팀이 선발된다. 앞으로 2년여 후에는, 교육 환경이 제한적인 ‘모든 아이들’을 위한 앱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이 대표는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전 세계 모든 7살 아이들이 학교 수업 따라갈 수 있게 준비시켜 주는 것. 전 세계 모든 2학년들이 2학년 문제를 풀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저희의 목표에요. 살아가는 세상은 달라도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어요. 보통 잘 사는 사람들만 누려서 그렇지 기술은 이미 와 있어요. 이 기술을 정교하게 잘 활용해서 기회를 열어주고 싶어요.”
서귀포=주선영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