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기업의 5년 생존율은 27.3%로, 창업가 10명 중 7명 이상이 5년 내 실패한다.(통계청 2015년 기준 기업생멸 행정통계) 39세 이하 청년창업의 경우, 사정은 더 안 좋다. 30세 미만 창업가의 5년 생존율은 15.9%에 불과했고, 30대 창업가는 25.2%에 그쳤다. 이는 청년들이 창업했을 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 창업 7년만에 연 100억대 매출을 올린 청년 창업가들이 있다. 창업 당시 이들의 평균 연령은 25.5세. 대학 졸업 직전, 서울 홍대 반지하 사무실에서 시작한 회사는 지금 서울, 경기, 대전, 대구, 부산 등 지점 10개로 늘어났다. 원목 가구 회사 ‘카레클린트’의 탁의성(33), 정재엽(33), 안오준(31) 공동대표들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이들이 청년 창업가를 돕겠다고 나섰다. 신청자 또는 팀이 사연을 보내주면, 그 중 몇 개를 채택해 카레클린트의 가구를 선물할 예정이다.
“우리도 청년 창업가이기에,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압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들을 돕고 싶어요.”(탁의성)
지난 7일, 인터뷰를 하러 간 서울 청담동의 카레클린트 매장에선 커피 향기가 났다. 매장 한켠에선 아메리카노, 라떼, 허브티 등 음료와 디저트를 팔고 손님들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이 가구 전시장인가.’ 인터뷰 장소를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한 기자는 탁의성 대표에게 전화했다.
“대표님, 카레클린트 매장이 선릉로 00건물 1층 아닌가요? 매장이 아니라 카페인데요.”
“제대로 찾으셨어요. 그 카페가 카레클린트 매장이에요.”
카레클린트의 매장은 일반 가구 전시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안쪽으로 기울어진 손잡이가 달린 소파, 울퉁불퉁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 모양의 탁자. 카페 가구들은 카페에 분위기를 더했고, 손님들은 카페를 이용하다 자연스레 카레클린트 가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대표들은 “매장을 카페로 꾸민 게 ‘신의 한 수’였다”라고 했다. 청담 매장을 오픈한 뒤 매출이 급상승한 것. 사람들은 카페라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가구를 마음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카레클린트의 ‘퍼니쳐 카페’(furniture cafe)를 주목했다.
카레클린트에는 이처럼 시대 흐름에 앞서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트렌드에 떠밀려가지 않고 주도하는 것’, ‘시류의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는 것’. 카레클린트의 모토(motto)다. 문득 아이디어의 원천이 궁금했다. 어디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느냐고 묻자, 세 대표는 지난 7년을 차근차근 되집어줬다.
◇‘미생’ 3인방 사장님 되다
-이런 가구매장은 처음 봅니다. 카페이자 가구 전시장인 거죠?
정재엽(이하 정): 오래 쓸 가구를 사는데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경험해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매장을 카페로 꾸몄습니다.
탁의성(이하 탁): 2011년 매장 오픈 당시 대부분의 원목 가구 매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앉아보고 만져보는 등 충분한 경험을 해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에 몇 백만원 씩 하는 고가의 제품을 사면서 대충 만져보고 앉아보는 게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보통의 매장 대신 카페 형식의 매장을 내게 됐죠.
-퍼니쳐 카페가 오픈하고 매출이 급상승했다는데, 어느 정도였나요?
정: 2010년 사업자 등록을 해서 2011년 홍대 앞에 매장을 차렸는데요. 2011년 론칭 이후 첫 매출이 4000만원이었어요. 이때부터 매출이 두배씩 늘었다가, 2011년 말 청담 매장을 냈는데, 이 때 월 매출 1억을 달성했고 매장 오픈한지 1년이 안돼 월 매출 3억으로 껑충 뛰었죠.
안오준(이하 안): 처음 카레클린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도 ‘퍼니처 카페’ 덕분이었어요. ‘독특한 콘셉트의 카페’로 언론 이곳저곳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죠. 그러면서 카페 이용객이 늘고 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고객이 되는… 이런 선순환적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안: 저희 셋이죠. ‘집단 지성’의 결과입니다.
정: 우리가 ‘집단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인 건지 모르겠지만(웃음), 분명 하나보다 셋이 모여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질적으로 훨씬 좋아요.
탁: 우리는 디자인부터 홍보, 외주업체 선정까지 반드시 셋이 함께 모든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협의합니다.
셋은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를 나왔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홍대 미대생’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정 대표는 “고시원에서 지내며 토익도 준비하고 남들 하는 건 다 했는데 취업이 안 됐다”면서 “한 광고회사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후 절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 접어든 2009년 9월, 셋은 힘을 합쳤다.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 것. 처음에는 명품 가방 렌트부터 전시대 판매까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그러다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가구였다. 나머지 둘도 정 대표와 함께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짜냈다. 낮에는 학교 생활을,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쪽잠을 잤다. 피로는 쌓여 갔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행복한 날은 잠시뿐, 돈이라는 큰 벽이 그들의 행진을 막았다.
-어떻게 창업 및 동업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탁: 취업이 안되거나 회사에 들어가도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이런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일단 공통적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업'(業)으로 삼고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정: 창업을 하자고 의견을 모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안: 이후부터 극한 생활의 연속이었지. 가진 돈이 셋이 합쳐 600만원 뿐이었어요. 이 돈으로 샘플 가구 하나도 못 만들었어요.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죠.
탁: 그래서 3일 안에 각자 1000만원씩 돈을 구해오기로 했어요. 정 대표는 여자친구(현재 아내)에게 빌렸고, 저와 오준이는 친구와 지인에게 이자를 주기로 하고 꿨습니다.
-돈이 없어 여자친구에게까지 사업자금을 빌릴 정도면… 보통 창업을 안하지 않나요? 혹은 창업 시기를 미루거나요.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창업한 이유가 뭐죠?
탁·정·안: (일동 웃음)
정: 와이프에게 빌린 돈은 다 갚았고, 살면서 그 고마움도 갚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창업을 시작했냐… 시장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창업을 서둘렀어요. 2009년 말~2010년 초 당시 원목맞춤가구에 대한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거든요. 그런데 국내에는 공방에서 만드는 100% 맞춤 가구나 또는 해외 수입 가구만 구입이 가능했죠. 게다가 수요는 늘었지만 공급은 그대로라 가구를 주문해서 받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격 또한 비쌌어요. 이 틈새 시장을 노리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겠더라고요.
-어떤 틈새 시장이요?
안: 가격은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 원목 맞춤가구의 품질은 보장하는 가구요. 소비자의 의견이 100% 반영된 맞춤 가구는 제작하는데 시간, 비용이 많이 들어요. 우리는 보다 제작이 쉬운 기성품과 맞춤형이 섞인 지금의 가구 모델을 구상했어요. 예를 들어 A라는 회사 고유의 디자인에 다리 한 개, 서랍 한 개 등을 더 제작해달라는 소비자의 간단한 요청사항을 넣는 거예요. 이러면 가구 제작도 쉬우면서 소비자의 만족도도 높일 수 있죠. 즉 원목의 질과 디자인은 보장하되, 공정 과정을 기성화하여 가격 단가를 낮췄죠.
-우리나라 대형 가구 회사에도 원목 가구가 있지 않나요? 기성화를 시키면 차별화가 될 수 있을지요.
탁: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부분이에요. 우리나라는 원목을 가구의 일부에만 써도 ‘원목 가구’라 칭할 수 있어요. 이에 관한 법적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테이블 상판은 합판인데 다리만 원목이어도 원목가구라 불러요. 대형 가구 회사들은 이런 식으로 팔아왔어요. 100% 원목 맞춤 가구도 판매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가격이 비싸고요.
-그래서 시장의 흐름에는 발맞췄는데…자금, 네트워크 등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많은 청년 창업가들에게 부족한 부분이잖아요.
안: 왜 없었겠어요. 사업 아이템과 자금은 어떻게든 만들어 놨는데, 사업 경험도 네트워크도 없으니 일이 진행이 안되더라고요.
탁: 3000만원을 들고 샘플 가구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는 공장이 하나도 없었어요. 학교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일산 가구 단지 등을 일일이 돌아보며 공장을 찾아다녔어요. 그렇게 한 곳을 정했는데 샘플의 질이 영 아니었죠. 그렇게 3000만원 중 2000만원이 날아갔습니다
정: 아니, 그 공장 사장님에게 도면을 줬는데, “자기만 믿으라, 만들 수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셨어요.
탁: 그 사장 말을 철떡같이 믿은 우리가 바보였죠. 차근차근 잘 알아보고 의뢰해야 했는데.
샘플 제작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 세 대표는 대출을 새로 받을 걱정에 숨이 막혔다. ‘사업은 시작도 안했는데 빚만 늘어나는구나’. 크게 망하기 전에 여기서 멈추자는 생각도 했단다. 그러나 셋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다른 공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렇게 발품을 판 지 어언 한 달. 30년 목수 경력의 ‘재야의 고수’를 만난 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놓았다. 카레클린트 역사의 첫 장면이다.
안: 우연히 어느 공장의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 아우라가 남다르더라고요. 자체적으로 가구를 만들고 고가구를 수리하는 공장이었는데요. 사장님에게 우리의 도면을 주고 만들 수 있냐 물어보니,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된다”면서 공정 과정을 막힘 없이 설명해 주더라고요.
탁: 사장님을 믿고 샘플 제작을 맡겼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샘플 가구로 영업을 뛴 뒤 주문을 받고 제작해 팔았죠. 지금도 그 공장과 거래하고 있는데요. 원래 직원 한 두명만 있던 공장에 지금은 직원 10명이 넘어요. 카레클린트와 함께 성장한 셈이에요.
-시행착오 끝에 경험과 네트워크가 생겼네요.
탁: 네. 어떤 경우에는 자금보다 네트워크, 경험이 더 가치있어요. 특히 ‘사람’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와 거래하는 공장 사장님, 배달 직원들 모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산이에요. 창업하는 분들은 ‘주변은 물론 지나간 인맥도 다시보자!’라는 마인드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정: 사실 이 부분은 발품을 팔아야 생겨요. 직접 뛰어다니고 경험해 봐야 믿을 만한 사람, 도움이 될 사람이 구분돼요.
안: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처럼, 우리가 이만큼 발품을 팔았으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직접 가구 배송을 다니고 가구에 대해 알고 싶다는 고객이 있으면, 고객을 찾아가 영업했어요. 그러면서 지금의 거래처, 협력사들과 관계를 맺었고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주변에 기대지 말고 실패를 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특유의 꼼꼼함으로 뒷수습을 담당하는 카레클린트의 ‘엄마’. 미술전공이지만 숫자에 강해서(대입 수능 수리영역 상위1%라고 본인 주장) 회계와 재무를 책임지고 있음 이성적이고 진지하지만 알고 보면 웃긴 남자. 카레클리트의 유일한 비(非) 품절남.
바쁜 와중에도 일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기획 중독자. 인테리어 전문가인 아내와 인기 블로그 ‘가남건녀’ 운영 중.
파워블로거 1세대로 하루 2만명이 꾸준히 방문하는 인기 블로거. 가구만큼이나 자동차를 끔찍이 사랑하는 카(car) 마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