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치유 돕다… 노지향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解)’ 대표
“도울 때 가장 즐겁다는 남편 권용석 변호사… 모금·이메일까지 직접 챙겨”
1997년부터 소년원 아이들·탈북자 등과 함께 ‘치유 연극’ 활동
참가자들, 자신의 이야기 대본 삼아 연기… 자존감 회복 도와
2009년엔 변호사 남편과 ㈔행복공장 설립해 소외계층 후원
“우리나라에 ‘치유 연극’을 도입, 10대 청소년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삶에 용기를 준 사람이 있다.”
지난달 비영리 전문가 100명이 아시아의 ‘숨은 영웅’을 발굴하기 위해 직접 기금을 조성해 만든,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APA·Asia Philanthropy Awards)’ 사무국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17장의 추천서가 도착했다. 김영욱 인천 숭의동본당 주임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추천서엔 김영욱 신부가 20년 전에 본 일화가 담겨 있었다. “한 소년원생이 호송버스에서 내리는데 수갑에 묶인 채 교도관 여럿에 이끌려 내려왔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아이의 수갑을 풀라고 한 건 바로 노지향 대표였죠. 한두 번 하고 말겠지 했는데, 퇴소 후에도 아이를 만나 챙기더라고요.”
주인공은 바로 노지향(55·사진)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解)’ 대표다. 1997년부터 20년 가까이 소년원, 탈북자, 이주노동자, 기지촌 할머니 등 수천 명의 소외계층을 만나 연극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온 인물이다. 그녀는 ‘2016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서 ‘올해의 여성 필란트로피스트’로 최종 선정됐다.
노 대표의 가장 열성팬이자 최대 스폰서는 바로 남편, 권용석(53)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다. 권 변호사 열아홉살 때 처음 만났다는 두 사람은 30년 넘게 ‘환상의 짝꿍’을 자랑한다. 부부는 2009년 함께 ‘㈔행복공장’이라는 비영리단체까지 설립, 나눔의 한 길을 걷고 있다.
◇무대와 객석 경계 허문 ‘신세계’…소외 계층에 활짝
세계적 연극연출가 ‘아우구스토 보알(Augusto Boal)’의 내한, 열흘간의 연극 워크숍. 1996년에 맞이한 이 워크숍은 그녀의 삶을 바꿨다.
“워크숍 후 ‘이게 답이다’ 싶어 함께 참여했던 6명과 ‘관객 참여 연극’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죠.”
당시 그녀는 중앙대 연극학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취미로 좋아하던 연극을 업(業)으로 삼아 극단 ‘연우무대’의 조연출로 발탁됐지만, ‘연극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컸을 때였다.
보알은 빈민가, 오지, 정글 등 연극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어디든 달려가, 관객 스스로 이야기하고 연극을 만들도록 한 연출가다. 20년 전, 그녀는 이 방법을 한국에 소개키로 결심한다.
“당시 무대에서 제 이야기를 하다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허물을 벗은 듯 확 깨고 나온 기분이 들었어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고 몸소 체험했죠.”
곧장 극단을 설립했다. 이름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解)’.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겨우 빚을 내 건물 지하 2층에 사무실을 구했다. 낯선 연극 방식을 몸에 익히고, 때론 관객들의 이야기를 즉흥 연기하기 위해 1년 동안 연습에만 매달렸다. 이후 처음 만난 소외 이웃이 바로 서울소년원 아이들. 당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면서 막연히 또래의 소년원 아이들이 생각난 게 시작이었다.
“소년원생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좋아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처음엔 어찌나 냉랭하던지. 당시에도 소년원에 수백 개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오가도 금방 사라져버리니 아이들의 반감이 컸던 거죠.”
자기표현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하는 것도 힘들었다. 매주 갈 때마다 족히 반나절 넘게 서너 달을 보내며 함께 먹고 잤다. 아이들에게 ‘폼 나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어 외부 공연장 도면까지 공수해 소년원 측에 ‘철통 보안’을 약속하며 야외 행사를 설득해냈다.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소년원에서 원생들을 외부로 출입시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 대표가 이끄는 치유 연극은 정해진 대본이 없다. 15명 내외의 참가자들과 20회가량 워크숍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한다. 덕분에 그녀는 소년원생들의 죄목은 몰라도, 아이들이 ‘제일 좋았을 때’, ‘후회되는 순간들’을 아는 유일한 어른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래요. ‘부모님 이외에 누군가 한 명만 이야기를 들어줬어도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고.”
노 대표는 그 한 명이 돼주기 위해 20년째 변함없이 서울소년원을 찾고 있다. 지속적인 관심은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20년전 소년원생이었던 이철수(가명)씨가 대표적. ‘나도 소중한 존재구나’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노 대표는 “출소 후 1년 뒤 철수를 만나 손을 잡았더니 굳은살이 딱딱해서, 마음이 짠했다”며 “이젠 자기 사업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라고 자랑했다.
이런 치유 연극 활동은 입소문을 탔다. 2001년 직접 극단을 초청한 하나원에서도 15년간 치유 연극을 해왔다. 뒤이어 이주노동자·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에서도 평균 5년 이상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 “한 번도 누굴 돕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조건 없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좋았을 뿐이죠. 내가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같이 한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맺은 인연이 더 오래 갈 수 있었어요.”
◇부부 함께 비영리단체 설립해 나눔 시너지
노 대표의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남편, 권용석 변호사다. 그는 2002년 특수부, 공안부를 두루 거치며 탄탄대로를 걷던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 그 때부터 4년여 간 고민 끝에 아내에게 비영리단체 설립을 제안했다. “검사 생활 딱 10년째였죠. 부모님과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시기였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어요. 검사는 끊임없이 의심해 진실을 밝혀나가는데, 사람을 못 믿게 되더라고요. 그게 정말 싫었죠. ‘이젠 내가 행복한 일을 찾아보자’ 싶더라고요.”
돌이켜보니 그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20여년 전 검사 시절이었다.
인천지검 특수부 동료 검사들과 파견 형사는 물론 출입기자까지 15명을 모아 ‘사람사랑’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매달 소정액을 모아 조손 가정 등 형편이 어려운 지역 아동들에게 생활비와 학용품 및 생필품을 지원해주기 위해서다. 그는 “사건을 맡아 보면, 많은 경우 한 부모 가정 등 사랑이나 관심이 부족했던 아이들이 비행이나 범죄에 빠지더라”며 “가정 환경으로 한 인생의 꽃이 피기 전에 져버리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고 한다.
다음에 부임한 제주지검 공안 검사 시절에도 동료 검사들과 직원 등 50여명을 모아 ‘푸르메’라는 나눔 동호회를 조직했다. 이번에는 매달 함께 제주 보육원에 일정액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의 평생 후원자를 하자’고 설득했다. 이를 위해 아이들과 분기마다 여행을 다니며 관계를 다졌다. 권 변호사는 “모두들 보람과 즐거움이 커서 10년 가까이 모임을 유지했다”며 “서울로 부임하고서도 아이들을 보기 위해 2~3년에 한 번씩 제주도를 찾곤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7년 전부터 ㈔행복공장을 설립·운영하면서 그야말로 ‘물’을 만났다. 서너 달씩 걸리는 사단법인 설립 절차부터 직접 도맡았다. 단체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변호사 일을 반으로 줄이고 일주일에 절반은 비영리단체 업무를 본다. 모금, 홍보부터 이메일 한 통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단체의 든든한 ‘살림꾼’ 역할을 한다.
“치유 연극이 있을 때마다 친형님들부터 가족, 지인들까지 모두 데리고 갔죠. 와서 보면 ‘재소자나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해 잘 몰랐는데 선입견을 갖고 구분 지으며 살았더라’고 해요. 친분으로 왔던 이들도 그 후론 매번 놓치지 않고 스스로 오더라고요.”
덕분에 현재 ㈔행복공장을 돕는 사람은 200여명 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법률이나 의료 지원 등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이들도 있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도 한다. 노 단장은 “한 자원봉사자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치유 연극을 돕기 위해 부천에서 평택을 오가고, 무대 의상을 새벽시장까지 뒤지며 구해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며 “행복공장이 운영되는 건 함께 해주는 분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준 덕분”이라고 했다.
◇1.5평 감옥에서 만나는 자신의 가장 큰 내면
두 사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재까지 털어 ‘큰일(?)’을 벌였다. 감옥을 만든 것이다. 시작은 권 변호사의 오랜 아이디어에서였다.
“제주지검에 있을 때 주 100시간 정도 근무했죠. 그만두지는 못하겠고 버티려니 힘들어서 ‘딱 일주일만 교도소 독방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엔 템플스테이 이런 개념도 없고, 아는 유일한 독방이 ‘감옥’뿐이었으니까요. ‘나중에 돈 벌면 내 것 하나 만들고, 혹시 다른 필요한 사람을 위해 같이 만들자’ 막연히 혼자 상상했었죠.”
그 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옥 짓기’가 목표라며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부인 노 단장 역시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큰데 정작 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일반인들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았다. 처음에는 부부가 가진 재산 10억원만 쏟아부어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최소 30인가량이 사용해야 건물 유지가 가능해 두 배의 예산이 더 필요한 상황. 그때 300여명이 십시일반 모금에 동참해줬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합해서 100년 넘는 인생의 모든 인맥을 다 동원했다”고 웃었다.
덕분에 2013년 강원도 홍천에는 ‘내 안의 감옥’이라는 명상 공간이 마련됐다. 300평 부지에는 약 30개의 개인 독방이 있다. 1인 공간은 약 1.5평뿐. 대신 답답함을 덜기 위해 천장을 높이고, 유리 창문을 크게 해 건물 뒤쪽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게끔 했다. 혼자 있는 방에서 다른 어떤 도움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온전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한다.
권 변호사는 “동물들은 상처받고 아프면 혼자 굴 속에 들어가 있다가 치유돼 나온다”며 “우리 스스로도 ‘자기 치유의 힘’이 있다”고 했다. 그는 감옥의 관리자이자 최다 이용객이기도 하다. “가장 힘들 때 그곳을 찾아가면 정말 마음의 찌꺼기가 나가듯 가벼워지는 게 참 신기하죠(웃음).” 현재 이곳을 이용하는 이들은 매월 80여명에 이른다.
두 사람은 ㈔행복공장을 하면서 개개인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다양한지 알게 됐다고 한다. 노 대표는 “말만이 아니라 치유 연극과 명상 체험 등으로 알게 된 모든 사람이 제각각 그 안에 ‘보석’이 있더라”며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할 사람도 없고, 덕분에 높은 사람도 크게 높아 보이지 않는 ‘삐딱함’도 생겼다”고 웃었다. 권 변호사는 “많은 사람이 행복공장에 모여서 다양한 색깔을 내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노 대표의 시상식은 오는 4월 27일(수) 한양대 HIT 대회의실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