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일)

[희망 허브] [숨은 영웅을 찾아서] ⑤ 빈곤의 고리 끊기 위해… 달려오다 보니 30년이네요

[숨은 영웅을 찾아서] (5) 황선업 ‘섬나의 집’ 지역아동센터장

보건복지부장관상 세 번째… 심사위원들 전원이 만장일치 밤이면 야학, 낮이면 엄마 위한 교실

창고 교회 한 귀퉁이에 주말 진료소…대전 최초 종일제 탁아소 운영부터 외국인 노동자·다문화 한부모까지

가장 낮은 현장에서 보듬어

‘섬나의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다. 96년 만들어져 20년 된 사물놀이단 ‘씨알문화패’는 섬나의집 어린이 예술단 중에서도 대표주자. 지금까지 공연한 횟수만도 300여회, 받은 상도 수십개다. 2010년도부터는 대전 다른 지역아동센터들과 함께 ‘너울가지합창단’도 만들었다. 황선업 지역아동센터장은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성취감도 맛보고 자존감도 높아지고, 세상도 배운다”며 “합창단은 절반 이상이 다문화 아이들인데 내년엔 아이들 데리고 엄마 고향인 베트남에 가서 공연하는 게 꿈” 이라고 했다. /임영근 씨영상미디어 기자
‘섬나의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다. 96년 만들어져 20년 된 사물놀이단 ‘씨알문화패’는 섬나의집 어린이 예술단 중에서도 대표주자. 지금까지 공연한 횟수만도 300여회, 받은 상도 수십개다. 2010년도부터는 대전 다른 지역아동센터들과 함께 ‘너울가지합창단’도 만들었다. 황선업 지역아동센터장은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성취감도 맛보고 자존감도 높아지고, 세상도 배운다”며 “합창단은 절반 이상이 다문화 아이들인데 내년엔 아이들 데리고 엄마 고향인 베트남에 가서 공연하는 게 꿈” 이라고 했다. /임영근 씨영상미디어 기자

황선업(56) ‘섬나의 집'(섬김과 나눔의 집) 지역아동센터장 이야기를 해준 분은 그녀를 이렇게 평했다.

“지난 3월에 황선업 센터장이 ‘지역아동센터 알찬마루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 전원이 ‘어휴~ 우리가 감히 그분을 어떻게 심사하느냐’고 했대요.”

궁금해졌다. 2005년과 2009년에 이어 올해로 복지부 장관상만도 세 번째라 했다. 섬나의 집은 대전시 대덕구 대화동에 있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좁다란 골목 언덕길 끝이었다.

“대전의 평범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는데, 남편하고 교회에서 만났어요. 서울에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하다 목회를 마음에 품고 대전으로 내려온 사람이었거든요. ‘가장 가난하고 낮은 곳으로 들어가 살자’며 함께 대전 곳곳을 찾아다녔는데 그때 만난 게 ‘대화동’이었어요. 84년에 결혼하고서 바로 이쪽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31년째네요.”

땅이 기름져 벼농사가 잘돼 ‘대화(大禾)’라 불렸던 곳. 이곳에 가난한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건 1970년대,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왔다. 공단을 둘러싸고 고만고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저희 집이 풍족한 편도 아니었는데, 생전 이렇게 가난한 지역은 처음이었어요. 울타리 하나에 쪽방 스무 개 이상 달린 ‘닭장집’이 빽빽이 붙어 있고, 수도나 화장실도 한 지역이 공동으로 써야 했어요. 리어카 하나 못 지날 정도로 골목은 좁은데, 골목으로 내어놓은 배기구에서 나오는 연탄 연기가 심해서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였고요.”

마을 조사부터 시작했다. 30쪽이 넘는 설문지를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가 눈도장을 찍었다. 대학생 지인들을 동원해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가장 필요한 것부터 첫걸음을 뗐다. 밤이면 야학을, 낮이면 엄마들을 위한 문해 교실을 열었다. 글과 노동법, 기타도 가르쳤다. 가난하면 아파도 병원 가기 힘들었던 시절, 창고 교회 한 귀퉁이는 병원도 되고 약국도 됐다. 주말마다 대학 병원 의사들을 불러 주말 진료소를 열었다. 이제는 흔해진 김장 나눔, 헌 옷 바자회도 그때는 모두가 처음이었다. 1986년엔 대전 지역 최초로 ‘종일제 탁아소’를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들이 아이들만 쪽방에 두고 밖에서 문 잠그고 다녔거든요. 지금으로선 펄쩍 뛸 일이지만 그땐 시대가 그랬어요. 아이들끼리 방에서 장난치다 실수로 불이 나 죽은 일도 있었고요.”

‘아이들 맡아 돌보겠다’ 했더니 공단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들이 두 손 들고 반겼다. 작은 창고를 꾸미고, 책걸상도 직접 만들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황 시설장은 “그저 아이들을 한 공간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밥 먹인다는 생각으로 선생님 한 명 두고 몸으로 때웠다”고 했다.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자 방과 후 공간도 필요해졌다. 작은 단독주택을 하나 빌려 ‘공부방’도 만들었다. 인근 한남대에서 봉사활동 동아리 대학생들을 불러왔다. 외환 위기 땐 굶는 아이가 쏟아졌다. 편부 가정도 많이 생겨났다.

“한번은 대화동 어떤 아이가 쓰러졌다며 연락이 와서 학교에 가보니, 사흘을 굶었더라고요. 엄마는 외환 위기 때 집 나갔고, 아빠는 돈 번다며 타지로 나갔는데 돈 떨어지고 먹을 게 없어 쫄쫄 굶다 쓰러진 거예요. 그 시기엔 그런 애들이 정말 많았어요. 기가 막혔죠. 저는 만삭이었고, 돈은 없고 괴로웠는데, 방학 되면 급식도 끊기겠다 싶어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하는 데까지 밥 먹여보자’ 했어요.”

커다란 솥에 밥을 하면 온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줄을 늘어섰다. 많을 땐 한 끼에 100명, 한 달에 한 가마니도 뚝딱이었다. 공단 주변 연구단지에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교수와 박사들을 모아 취약 가정 아이들을 1대1 후원하게 다리 놓는 ‘작은자사랑회’ 결연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매월 한 가정에 5000원, 그 돈으로 밥도 해먹이고 학교도 보냈다.

‘섬나의집’ 너울가지합창단(사진 위)과 씨알문화패. /섬나의집 제공
‘섬나의집’ 너울가지합창단(사진 위)과 씨알문화패. /섬나의집 제공

지역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모임들이 늘어나면서, 제도적 기반도 조금씩 만들어졌다.

“민간에서 결식 문제를 도맡았는데, 2000년 되니까 아이들은 계속 늘고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고요. 2000년 1월, ‘결식 아동은 정부가 책임지라’고 하면서 전국 공부방 아이들이 국회 앞에 모여서 노란 풍선 들고 한 바퀴를 돌았어요. 여론이 세게 조성되면서 이례적으로 그다음 날 바로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하더군요.”

1990년대 ‘영유아 보육법’ 제정에서부터 2004년 6월 ‘아동복지법’ 재개정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공부방)도 차례로 법제화됐다. 2004년부터 지역아동센터로 한 달에 64만7000원씩 정부 지원금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국 지역아동센터협의회 네트워크 조직이 꾸려지는 데도 황 센터장의 공이 컸다. 가장 낮은 현장에서 뛰어온 지난 30년. 시간이 흐르면서 보듬어야 할 사람들도 조금씩 바뀌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대전에 뜻이 비슷한 이들을 모아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하는 모임’ 단체를 발족했다. 지역 내 홀로 사는 어르신, 조손 가정도 돌봐야 할 이들이었다. ‘며느리가 가출한 할머니 모임’이란 이름으로 지역 어르신 열댓 분을 모았다. 할머니 14명 모아 수건도 돌리고 식사도 대접하던 게 점점 일이 커져, ‘실버 레스토랑’ 오픈까지 이어졌다.

“2006년쯤이었는데, 그땐 사회적기업이란 것도 없던 때예요. ‘어르신들이 일할 곳이 필요하겠다’ 고민하다가, 스스로 하실 만한 게 없을까 찾게 됐어요. 동네에 작은 가게 공간 하나 얻어서 푸드 뱅크에서 남는 깨끗한 밥 모아 누룽지를 만들어 팔았어요. 말린 밥을 빻고 쑥을 첨가해 쑥 미숫가루도 만들어 팔고. 대전시에서도 반응이 좋고 어르신들도 참 재미있게 하셨어요. 한 5년쯤 사업하다 지금은 ‘푸드 뱅크 마켓’으로 바꿨어요. 어르신들이 아직도 직접 운영하세요. 지역 어르신들 사랑방 역할도 하고요.”

황 센터장은 지난 30년을 “앞만 보고 경주마같이 달려왔던 시간”이라 했다. “늘 바빴어요. 항상 일이 많았고, 돈은 늘 부족했고. 도와야 할 이도 많았고. 우리 같은 부모한테서 태어나 아이들이 참 고생했죠.” 다른 집 아이들 챙기다 보니 정작 자기 아이에게 교복도 못 사준 기억은 여태껏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죄책감이다. 그녀에겐 요즘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다문화 한 부모 가정을 위한 공동체 주택을 만드는 것이다. 알코올중독, 가정 폭력, 생활비, 시집살이, 인격 모독, 감금 등 여러 문제를 견디다 못해 가출하거나 이혼하는 ‘다문화 한 부모 가정’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는 ‘민들레다문화지원센터’도 시작했다.

“한국 사람도 혼자 아이 키우려면 얼마나 힘들어요. 다문화 한 부모 가정은 말도 못해요. 이국 땅에서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죠. 고향에 돈도 보내야 해요. 애들은 애들대로 돌봄이 취약해, 한 살인데 스마트폰이나 TV 중독에 걸린 아이도 많아요. 대화동 초등학교에 1학년이 총 7명인데, 한 명 빼곤 다문화 가정 아동이에요. 이 엄마들이랑 함께 공동체 주택 꾸려서 같이 생활하며 아이들도 돌보고, 교육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디 후원자만 있으면 바로 들어갈 텐데 말이죠(웃음).” 황 시설장은 “30년간 아득바득 애썼지만 빈곤의 고리를 끊는다는 게 정말로 쉽지 않다”고 했다.

“교회가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지역사회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지역아동센터이고 또 교회예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교회만 바로 서도 이렇게까지 사회가 암울하진 않다고 봅니다. 교회가 낮은 이들을 위해 애쓰고 기도하진 못할망정, 오죽하면 사회에서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잖아요.”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