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방] 까칠한 인터뷰이가 좋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기자’라는 직업에 냉소적인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미 기자라는 인간들을 만나볼 만큼 만나봤으며, 내 앞에 있는 당신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잘 안다’는 눈빛을 하고 있죠. 기자들이 어떤 실수와 잘못을 했는지 설명해주는 인터뷰이도 있습니다. 사건이 터지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어선 정작 기사에는 자극적인 얘기만 가득 쓰고 꼭 써달라고 했던 중요한 얘긴 쏙 빼놓는다는 푸념이죠. 이상한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냉소적인 인터뷰이를 좋아합니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현장 전문가라는 것, 자기 업적을 부풀리지 않는다는 것, 기사에 멋있게 나가는 걸 싫어한다는 것 등입니다. ‘제발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니 인터뷰 초반에는 분위기가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파수가 맞아떨어지면,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모두 그랬습니다. 더나은미래는 2018년 마지막을 장식할 12월호 커버스토리 주인공으로 지난 20년간 북한을 80여 차례 다녀온 인세반 유진벨재단 이사장을 택했습니다. 인터뷰 날짜와 시간을 조율하면서 ‘까다로운 사람일 수 있겠다’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후배는 ‘쉽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는 기자나 언론에 대해 냉정함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기사에는 빠졌지만,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개발 구호 사업은 유엔 대북 제재에 걸리지만, 식량·의약품 지원을 하는 순수 자선 단체는 대북 제재와 관련이 없다. 그런데 기자들이 그걸 구별 못 하고

[진실의 방] 제3섹터, 주류(主流)가 되다

강물의 원줄기가 되는 큰 흐름을 주류(主流)라고 합니다. 사상이나 문학의 주된 경향을 얘기할 때도 주류라는 말을 쓰죠.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 다수의 사람이 속한 쪽을 가리킬 때도 주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반대말은 비주류(非主流).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생각이나 주장, 혹은 집단 내의 소수파를 비주류라고 부르죠. 굳이 따지자면 ‘제3섹터’는 비주류에 가까웠습니다. 주류, 즉 정부(국영)나 기업(민영)을 제외한 나머지가 제3섹터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형태죠. 비영리단체나 공익법인, NPO와 NGO,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소셜벤처 등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다양한 주체가 제3섹터 내에 혼재합니다. 기업에서 CSR을 담당하는 팀, 더나은미래와 같은 공익 전문 매체 기자들까지 제3섹터에 포함시키기도 하죠. 과거 제3섹터의 활동은 각개전투 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각자의 신념과 무기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변방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대중의 관심을 확 끌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분명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장면들에서 놀라운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며 자연스럽게 텀블러를 내미는 사람들을 볼 때, 누군가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소개했는데 ‘정말?’이라고 되묻는 사람이 없을 때, 속으로 살짝 놀라곤 했습니다. 환경, 젠더, 노동, 인권 등 제3섹터에서 주로 다뤄왔던 주제들은 더이상 변방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부와 기업 등 주류 세계에서도 제3섹터의 주제들을 중요한 이슈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비주류였던 제3섹터가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주류화’ 현상은 내년에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공익활동가, 사회혁신가

[진실의 방] ‘혜화동 1번지’를 아시나요?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메카’로 불리는 대학로는 서울에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납니다. 최근 몇 년간 건물 임대료가 지나치게 오르면서 수십년 역사를 가진 극단들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는 일이 계속되고 있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제보를 접했습니다. 바로 ‘혜화동 1번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10여 년 전까지 대학로 공연예술계에 몸담았다는 제보자가 기억을 더듬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대학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2000년대 초 이미 진행 중이었고, 2004년 대학로가 서울시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임대료가 본격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극단들은 건물주와 싸울 엄두도 못 내고 극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대학로에 대자본이 유입되면서 대형극장들이 들어섰고, 영세한 소극장들은 더욱 궁지에 내몰리게 됐다고 합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25년을 버틴 극단이 있으니, 바로 ‘혜화동 1번지’입니다. 1993년 시작된 혜화동 1번지는 5~6명의 연출가가 기수를 이어가며 극장을 물려주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우리 연극계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영향력 있는 연극을 선보이는 단체로 손꼽히죠. 제보자는 “혜화동 1번지가 한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세월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건물주의 의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건물주 할아버지는 연극에 대해 잘 아는 분은 아니었지만 젊은 연극인들의 열정과 노력을 늘 응원하셨다”며 “다른 극장들이 임대료를 올릴 때에도 저렴한 월세로 연극인들에게 공간을 내줬다”고 떠올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건물주야말로 우리 문화예술계의 숨은 공로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부도 답을 찾지 못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해결한 사회 혁신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정작 주목해야 할 사람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선하고

[진실의 방] 진정한 사회 혁신은 ‘비영리’로부터

어디에나 ‘사각지대’가 있죠. 최근 발표된 정부의 일자리 정책들을 살펴보다가 큼지막한 사각지대를 발견했습니다. 중소기업, 소셜벤처, 사회적기업으로 청년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비영리조직’을 위한 일자리 지원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청년이 비영리에 몸담고 있지만, 풍성한 잔치판 어디에도 그들이 낄 자리는 없습니다.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비영리 청년들은 그저 씁쓸하게 웃어넘깁니다. 정부의 눈에 비영리조직은 ‘일자리’가 아닌 걸까요? 비영리에 대한 잣대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윤리성이 강조되는 조직이다 보니 일부에서 문제가 터지면 비영리 전체가 욕을 먹습니다. 조직의 건전성, 운영의 투명성 문제가 곧바로 도마 위에 오르고,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후속 조치들이 내려집니다. 물론 비영리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게 감시와 규제뿐일까요. 비영리 활동가들을 만나다 보면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얼마 전 만난 한 비영리재단 관계자는 “직원 뽑는 공고를 냈는데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비영리로 들어와야 세상이 바뀌는데, 일이 힘들고 임금이 낮다는 인식 때문에 인재들을 놓치고 있다는 얘기였죠. ‘사명감으로 하지만 배고픈 일’. 비영리 일자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딱 거기에 머물러 있는듯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비영리조직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비영리에서 진정한 사회 혁신이 이뤄진다고 주장합니다. 미세 먼지, 플라스틱 쓰레기, 물 부족, 아동인권, 동물 학대, 빈부격차 등 눈앞에 닥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유능하고 혁신적인 조직으로 비영리를 꼽습니다. 정부가

[진실의 방] 소셜벤처, 냉정한 조언이 필요한 때

한때 각종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소셜벤처의 스타’들이 있습니다. 2010년대 초 등장한 ‘위즈돔’ ‘집밥’ ‘열정대학’ 등 이른바 ‘1세대 소셜벤처’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소셜미션(social mission)을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풀어내며 소셜벤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후발주자가 그들의 성공 스토리에 용기를 얻어 소셜벤처에 뛰어들었고, 덕분에 척박했던 사회적경제 생태계는 눈에 띄게 풍성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1세대 소셜벤처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제보가 여러 곳에서 접수됐습니다. 그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내부의 갈등으로,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서, 투자금이 빠져서….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살아남느냐, 망하느냐. 갈림길에 선 1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앞으로 소셜벤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묻는 사람에게도 대답하는 사람에게도 참 불편한 질문입니다. 아프고 괴로운 이야기였을 텐데, 1세대들은 기꺼이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 응해줬습니다. ‘잘 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1세대들의 냉정한 조언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전략적으로 잘 망해야 손해가 줄고 더 빨리 일어설 수 있다는 얘기였죠. 소셜벤처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폐업을 코칭해주는 모임’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공생과 연대의 한가운데 그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릴 때 우리는 항상 실수를 합니다. 정부와 기업이 소셜벤처 지원정책과 프로그램을 무더기로 쏟아내면서 생태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실수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과대 포장, 확대 해석을 싹 걷어내고 알맹이를 봅시다. 소셜벤처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지속가능성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소셜벤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바뀌어야

[진실의 방]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태국 동굴 소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다 뭉클해졌습니다. 소년들이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팠다’는 대목이었죠. 캄캄한 동굴 속에서 먹지도 못한 채 17일이나 고립돼 있던 소년들이 매일 땅을 팠다고 합니다. 깊이가 5m나 되는 구덩이도 있었다고 하죠. 대체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한 걸까요? 열심히 땅을 파면 그곳을 벗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혹은 간절함? 그 동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소년들이 잘 버텨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게 ‘땅 파기’ 덕분인 건 확실합니다. 때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대체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7월 초 더나은미래 편집장으로 왔을 때 가졌던 의문이기도 합니다. ‘공익’이라는 분야에 대한 기자들의 열정에 살짝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기사 하나 쓰는 데 열 명을 인터뷰하는 건 흔한 일. 놀라울 만큼 방대한 데이터를 밤을 새워 분석하고, 틈틈이 독서토론까지. 동력이 무엇이냐고 본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더군요. 이제 제가 직접 부딪쳐 알아내려 합니다. 편집장 레터를 쓰게 된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더나은미래를 위해 애써준 김경하 부편집장과 주선영 기자.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