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자원봉사 현장에도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2022년 전국 사회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 사람은 53만여 명으로, 코로나19 유행 이전(2019년 125만 6421명)에 견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감염병 유행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크게 위축된 자원봉사, 더나은미래는 ‘더나미GO’ 코너에서 기자가 직접 ‘봉사자’로 참여해 다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나눔의 현장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
“리오야, 잠이 안 오니?” 다정한 목소리가 묻는다. “응.” 중저음의 답변이 날아온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빵’ 웃음을 터뜨린다. “좀 더 아이다운 목소리였으면 좋겠어요.” 성우가 일러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리오’ 역할의 사람은 애써 아이 목소리에 다시 도전해 본다. 또 다른 사람은 코 한쪽을 막고 공룡 목소리를 연기했다. ‘쿠쿠궁’, 공간 여기저기서 입으로 내는 효과음 소리가 들렸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신세계아이앤씨 본사 건물 15층, 한참 근무 중일 오후 1시의 회의실 모습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름아닌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한 신세계아이앤씨 직원들, 이날 회의실은 업무 이야기가 아닌 동화책을 읽는 경쾌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신세계아이앤씨는 2015년부터 임직원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봉사활동은 ‘목소리 재능기부’다. 시각장애, 다문화 배경 아동 등 독서 취약계층 아동을 위해 동화책에 내레이션을 입히는 봉사다. 6개월마다 한 번씩 30명의 임직원이 5인 1조로 나뉘어 총 12권 분량의 동화책 음성 파일을 제작한다.
조하혜 신세계아이앤씨 ESG추진팀 담당은 “선착순 서른 명만 신청할 수 있는데, 프로그램 모집 마감이 거의 ‘아이유 콘서트’만큼 빠르다”며 “분 단위로 마감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30일, 기자가 직접 인기의 비결을 체험하기 위해 신세계아이앤씨 본사로 찾아갔다.
봉사 4일 전, 녹음 일정과 역할 등을 메일로 받았다. 기자가 받은 배역은 총 두 가지. 첫 번째는 까칠한 성격으로 고독한 삶을 살다 다른 공룡을 지키게 되는 ‘티라노사우루스’, 두 번째는 아빠와 함께 장난감 세상과 달나라로 떠나는 아이 ‘리오’ 내레이션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혹감’이었다. 취미로 연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그 배역이 티라노사우루스나 아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 맞나’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잠시, 활동 전 성우 강의가 있다는 안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안심한 상태로 동화책을 읽어내리며 역할을 분석했다.
활동 당일, 설레는 마음과 긴장되는 마음을 동시에 안고 신세계아이앤씨로 향했다. 회의실 책상 위에는 성우 강의 자료가 놓여있었다. ‘경력직 봉사자’도 꽤 있었다. 같은 조인 영업기획팀 김지해 씨는 “이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재밌어서 또 신청했다”고 말했다.
프로그램 개요와 일정에 대한 안내가 끝난 뒤 이상헌 성우의 강의가 시작됐다. “동화책에는 보통 착한 역할과 나쁜 역할이 나와요. 착한 역은 말끝이 길게 늘어지는 밝은 목소리죠. 나쁜 역할은 반대로 하시면 돼요. 말끝을 뚝뚝 끊어서 차가운 목소리로요.”
기쁨·슬픔·분노 등 대사에 다양한 감정을 담아 외친 뒤, 본격적인 실습이 시작됐다. 조별로 돌아가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 뒤 성우의 조언을 받았다.
“토들이, 미안해. 토들이, 사랑해.” 한 직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연기한다. “어머님이 좀 차가우시네. 그러면 엄마가 진짜 토들이를 안 사랑하는 것처럼 들려요.” 모두 ‘하하하’ 웃고 나서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토들이 엄마’를 바라본다.
기자가 속한 조의 차례가 왔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나는 밤이 싫어요. 밤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최대한 높은 목소리를 쥐어짜 연기하니 더 높게 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직설적인 평가가 담긴 조언을 들으니 감이 잡혀갔다.
우리 조의 어린아이 역할은 유독 낮은 목소리의 직원이 담당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직원들의 웃음이 따라붙었다. 기자도 조금 웃음을 참았다. 결국 목소리가 높은 직원과 역할을 바꾸기로 했다.
웃음이 가득했던 연습이 끝난 뒤, 조별로 나뉘어 마이크 등 녹음 장비를 마련한 옆 회의실로 이동했다. 조마다 녹음을 감독하는 음향 감독이 섬세하게 연기를 가르쳤다. 지시에 따라 마이크를 주먹 하나 거리에 두고 ‘티라노’ 열연을 펼쳤다. 음향 감독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든 순간,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티라노 빙의’에 성공했다.
멋쩍어하던 조원들도 마이크를 앞에 두자 달라졌다. 귀여운 어린 공룡 ‘파파사우르스’를 맡은 스타벅스팀 강현수 씨는 “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멋쩍어하던 것도 잠시, 음향 감독의 시범을 따라하며 어린 공룡의 목소리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작은 소음도 녹음될 수 있기에 자신의 역할이 나오지 않을 때는 숨죽여 가만히 있어야 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그대로 담기기 때문에 모두가 음향 감독의 손짓에 맞춰 움직였다. 1시간 가량 대사를 주고받기도, 서로의 연기를 보며 웃고 응원하기도, 소음이 들어가지 않게 신경 쓰기도 하니 자연스레 ‘전우애’가 생겼다.
녹음을 마치고 소감을 묻자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앞에서 감독해 주신 덕분에 잘 할 수 있었다”, “다른 분들이 연기를 지적받는 모습이 제일 재밌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 등의 답변이 나왔다. 녹음 과정은 힘들다기보다는 즐거웠다. 동화책 2권 분량이 많게 느껴졌는데 몇 권 더 하고 싶은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왜 ‘경력직 봉사자’가 많은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만든 음성 파일은 배경음악과 효과음 등을 입혀, 동화책과 녹음 음성이 나오는 독서보조기기와 함께 신세계아이앤씨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의 초등돌봄센터로 간다. ‘전문 성우가 아닌 임직원의 목소리로 녹음된 음성인데 아이들이 좋아할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목소리 재능기부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는 알로하 아이디어스의 강원화 사무장은 “지역아동센터 현장에서는 성우가 아닌 일반인의 목소리를 아이들이 더 재밌게 느낀다고 한다”며 “여러 명의 다양하고 친숙한 목소리가 들어가니 오히려 정제된 목소리보다 더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으니 웃음이 가득했던 연습 현장이 떠올랐다. 성우의 정제된 목소리 내레이션과는 다른 매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 재능기부는 2015년부터 9년간 이어진 프로그램이다. 총 1065명의 임직원이 참여해 동화책 3100권과 함께 녹음 음성이 나오는 독서보조기기 170대를 기부했다. 9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재미’였다. 조 담당은 “성우 일일 수업처럼 재밌어서 봉사하는 것 같지 않았다는 후기가 많다”며 “활동 자체가 재밌으니 입소문이 퍼지면서 지속할 수 있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인기에 힘입어 코로나19 시기에도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녹음 공간 대여가 어려워지면 회사 내 공간을 마련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회사 구성원과 함께 연기를 하는 것도 재미 요소 중 하나다. 형태준 신세계아이앤씨 대표도 목소리 기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조 담당은 “당시 대표님도 주인공 꼬마 역할을 맡아 신입사원과 한 조가 되어 목소리 재능기부 활동에 참여했다”며 “동화 속 인물을 연기하며 역할을 바꾸니 더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임직원 봉사활동의 효과는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것. 신세계그룹에는 모든 임직원의 핵심성과지표 10%를 봉사활동 등 사회공헌 활동으로 평가하는 ‘CSR 실천평가’ 제도가 있다. 이에 따라 임직원은 반기별로 4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진행하거나 헌혈·캠페인·관련 교육 등에 참여해야 한다. 사내 게시판을 통해 원하는 봉사활동을 직접 신청한 뒤 활동을 마치면 봉사 시간과 함께 ‘CSR 포인트’를 받을 수 있다.
김경주 신세계아이앤씨 ESG추진팀 매니저는 “봉사활동이 근무 시간 내에 이뤄지니 참여자의 부담도 적다”면서 “임직원 봉사활동 문화가 일상으로도 확장돼 회사 외에서도 매년 500명 이상의 구성원이 직접 지역사회나 기관 등을 찾아 개별 봉사활동을 진행한다”고 전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kyuriou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