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10년 넘어도 적응 못해
가족 전 구성원 대상 통합 지원 필요
부모 우울감-자녀 방임 악순환 끊어야
“아이들도 알아요. 엄마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엄마 스트레스는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새로운 문화에 적응은 어렵고, 고향은 더 그리워지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웃으면서 대할 수 있을까요?”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이모(32)씨는 캄보디아 출신 결혼이주여성 A씨를 2021년 4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상담했다. A씨는 스무살이었던 2009년 한국 남성과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남편은 10년 넘게 변변한 수입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한국어가 미숙한 A씨가 직접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구실로 시댁의 구박까지 이어졌다.
A씨는 줄곧 우울감에 시달렸다. 3년 전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시도때도 없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분과 우울이 번갈아 나타나는 양극성 장애도 생겼다. A씨 상태가 불안정해지자 자녀들까지 이상 행동을 보였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에게 불안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또래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언어장애 판정도 받았다. 이씨는 “평소 상담 때는 ‘모성애가 없나’ 싶을 정도로 A씨는 자녀 이야기에 무심했는데,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는 목놓아 울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결혼이주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국내 다문화 가구 수는 34만6017가구로 추정된다. 5년 전에 비해 20% 가량 증가한 수치다. 20여 년간 유입된 결혼이주여성들의 한국 체류 기간은 점차 길어지고 있다. 결혼이민자와 귀화자 가운데 한국 생활 10년이 넘은 비율은 68.8%에 달하지만, 이들의 한국생활 적응은 여전히 쉽지 않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이민자와 귀화자는 5명 중 1명꼴로 경제적 어려움(21%)과 외로움(19.6%)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배우자와 이혼하거나 별거할 경우 사정은 더 어려워진다. 여성가족부 자료에 따르면 결혼이민자·귀화자가 이혼이나 별거를 하고도 자녀를 맡아 키우는 비율은 93.3%에 달한다. 이 중 약 60%는 양육비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벌이는 부족하다. 이혼한 결혼이민자의 절반은 한 달 수익이 200만원 미만이다. 다문화 청소년을 돕는 정종원 프래밀리 대표는 “가정불화로 이혼하거나 별거 상황에서 우울증을 앓는 결혼이주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하다 보면 정신건강은 더 나빠지고, 아이는 온종일 방치되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위안을 얻는 곳은 모국 사람들끼리 꾸린 자조모임이다. 박승호 포천하랑센터장은 “서로의 상황을 나누면서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가족센터’라는 이름으로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전국 가족센터는 230곳이다. 17개 시도별로 구분하면 서울(26곳), 경기(31곳), 인천(9곳) 등 수도권에 66곳이 있다. 비율로 따지면 28.6%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의 거주 지역 분포를 살펴보면 수도권에 56.1%가 몰려있다. 박옥식 한국다문화청소년협회 이사장은 “가족센터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지만 운영 시간은 대부분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로 돼있고, 주말에 별도 프로그램이 진행되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는다”라며 “평일에 일하는 다문화 가정 부모들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정종원 프래밀리 대표는 “가족센터에서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대부분이 주중에 이뤄지면서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다문화 부모는 매우 적다”며 “개설 프로그램도 한국어 교육이나 문화 체험 등에 집중돼 있어 심리정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문화 가정의 심리정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상담이나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정부 차원의 지원 체계에서는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 가정 자녀 등을 구분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도 지적됐다. 사회복지사 이모씨는 “가족센터에서 다문화 가정 자녀를 상담하던 상담사가 한참 후에야 아이의 엄마도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우울증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상황이 종종 있다”며 “한 가족을 통합적으로 돌볼 수 있는 지원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황원규 기자 wonq@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