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청소년 5명 중 1명 우울감 호소
사회적 관계 단절한 청소년 발굴이 과제
올해 고3인 A양은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또래와 조금 다른 외모를 가졌다. 이국적인 외모는 학교에서 늘 놀림거리였다. 속 터놓을 곳이 필요했지만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사춘기를 겪을 때도 어머니는 바빴다. 낮에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고, 밤에는 방직공장에 나가 철야 작업을 했다. 주말에도 식당에 나가 돈을 벌었다. 몇 해 전에는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새 가족을 만났다. 동생도 3명이 더 생겼다. 새 아버지와 어색한 관계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결국 일이 터졌다. 학교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교실 물건을 마구 집어던졌다. 그나마 이야기 나누던 친구들도 점점 멀어졌다. A양은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8개월을 집에서만 지냈다.
A양의 사례는 보기 드문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은 학교를 그만두거나 아예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1년 한해에만 전국 초중고 다문화 학생 1312명이 학업을 중단했다. 국내 다문화 가정 학생 수는 지난해 기준 16만8645명. 지난 2012년 4만6954명에서 10년새 3.5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국 학생 수는 673만명에서 535만명으로 약 20% 줄었다. 현장 관계자들은 “학령 인구 감소에도 다문화 가정 학생은 급증하는 추세인데,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수준을 넘어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다문화 청소년이 급속도로 늘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 전국 다문화 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 사이 2주 이상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다문화 청소년의 응답 비율은 19.2%였다. 박옥식 한국다문화청소년협회 이사장은 “정부 통계에서는 20%에 못 미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상황은 다르다”라며 “협회에서 130가구 넘는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데 아이들의 절반 정도가 우울이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협회 자체 조사에서 다문화 청소년의 약 15%는 전문 상담과 치료가 시급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최근 우울증으로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 B양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지난해 베트남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가 이혼하면서 불안과 우울 증상이 나타났다. 서른 살 차이나던 부부는 B양이 어릴 때부터 자주 다퉜다. 아버지는 의처증으로 집안에 CCTV를 설치하고 욕도 퍼부었다. 채하경 다문화월드비전센터장은 “부부는 결국 헤어졌지만, 지금도 아이는 늘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부 사이가 안 좋더라고 아이 문제에 대해서는 합심해야 하는데, 부부간 언어 장벽 때문에 깊은 대화가 안 되다보니 아이 문제에 대해서도 의논하지를 못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아이들 주변에 회복을 도울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어릴 적부터 상처가 누적된 아이들은 부모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문화 청소년 지원시설 포천하랑센터의 박승호 센터장은 “아이들은 한국인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많고, 한국말이 서툰 어머니에게는 잘 속마음을 꺼내지 않는다”며 “그러다 상처가 깊어지고 스스로 더 고립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가 아이의 문제를 인식해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손을 놓는 경우가 많다. 박 센터장은 “부모들이 어떤 정부 지원이 있는지 모르고, 언어 능력이 부족해 주변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네트워크 단절은 장기 은둔으로 이어진다. 현장 관계자들에게는 관계를 단절한 아이들을 찾아내는 것도 과제다. 박 센터장은 “다문화가족 자조모임을 통해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꾸준히 교류해야 한다”라며 “가족들과 신뢰를 쌓아야 아이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적절한 도움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황원규 기자 wonq@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