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그 후] 포스코 조기 정상화의 ‘숨은 영웅’ <끝>
시니어들 노하우로 고비마다 문제 해결
쇳물 모래밭에 부어 긴급대응 나서기도
MZ 직원들 아이디어도 빠른 복구에 한몫
“선배님, 이틀 안에 되겠습니까?”
“설계 도면 짤 시간도 없네요. 일단 해 봅시다.”
전 직장 동료의 전화를 받은 이원홍(74)씨는 바로 출근하겠노라 말했다. 지난해 9월 6일 태풍 힌남노가 포항제철소를 덮친 그날의 일이다.
이씨는 포스코 제선부에서 정년을 마친 잔뼈 굵은 철강 베테랑이다. 포항제철소를 떠난 지 오래지만, 회사에서는 제철소 복구에 이씨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포항제철소가 지난해 태풍으로 인한 침수 피해를 완전 복구하고 지난달 20일 완전 정상화됐다. 피해 발생 135일 만이다. 사고 당시 완전 복구까지 1년 넘게 걸릴 거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고비마다 시니어들의 노하우와 이해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복구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는 게 포스코 측의 설명이다.
이번 복구 작업에는 이씨처럼 정년을 마치고 현장을 떠났던 은퇴 직원들과 명장 등 전문 엔지니어들의 역할이 컸다. 제철소 정상화의 ‘숨은 영웅’들이다. 이들은 재난 상황에서 빠른 의사결정을 주도했고, 수십년 전에 사라진 옛기술을 구현해 긴급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이씨는 “평생을 제철소에서 보냈는데 무슨 핑계를 대고 안 나갈 수 있겠느냐”라며 “보름간 자정까지 작업하고 집에서 잠깐 눈 붙이고 다시 현장으로 나갔는데 현역 때만큼 열심히 했다”고 했다.
은퇴 선배 지휘로 이틀 만에 ‘뚝딱’… 후배들 박수가 터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고로(高爐·용광로)에서 생산된 갈 곳 잃은 쇳물이었다. 약 1500도 온도로 펄펄 끓는 쇳물을 받아낼 제강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정전으로 멈춘 고로 안에 둘 수도 없었다. 이대로 쇳물이 식으면 공장 피해는 더 커지고, 복구는 늦어질 위기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쇳물을 모래에 받아내는 ‘사처리장’을 설치해야 하는데, 30여 년 전 철거한 탓에 설계나 운영을 해 본 직원이 전혀 없었다. 은퇴 시니어인 이원홍씨가 복구 작업을 지휘하게 된 배경이다.
“사처리장은 모래밭에 쇳물을 받아낼 수 있는 커다란 욕조 같은 겁니다. 철광석 찌꺼기인 슬래그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덮어 만들어요. 펄펄 끓는 쇳물을 얇게, 그리고 넓게 퍼지도록 하는 게 관건입니다. 또 흘러넘치지 않도록 둑도 쌓아야 하지요.”
이씨가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사처리장 조성은 대개 수개월이 걸린다. 부지 선정부터 설계와 시공까지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이씨는 “고로에서 나온 쇳물은 10시간에 10도씩 식는다”며 “사실상 축구장 절반 크기 공장 하나를 짓는 건데 시간이 없으니까 설계도면 없이 경험에 의지해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원홍씨는 1974년 4월 1일 포스코에 입사했다. 그렇게 31년 6개월을 철강인으로 살았다. 퇴직 후에는 인도네시아 칠레곤 지역의 ‘크라카타우포스코’ 제철소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씨는 “퇴직자들의 노하우를 해외 법인 직원들에게 전수하는 일을 맡았다”며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사처리장도 현지에서 직접 운영한 경험이 도움됐다”고 말했다.
포항제철소 제선부의 김수학 명장과 광양제철소의 배동석 명장도 작업에 힘을 보탰다. 30년 동안 포항제철소 제선부에서 일한 퇴직자 이정만(67)씨도 안전관리에 나섰다. 그렇게 보름간 모래밭에 받아낸 쇳물은 7000t 규모에 이른다.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은 “사처리 경험이 있었던 이원홍 선배와 함께 김수학, 배동석 명장 등 양소 전문가들이 사흘 만에 사처리장을 긴급히 만들어 위기를 넘을 수 있었다”라고 했다.
MZ세대도 기지 발휘… 위기 상황서 세대 구분 없었다
시니어들의 빛나는 노하우만큼이나 MZ세대 직원들의 아이디어도 빠른 복구에 한몫했다. 포항제철소는 이번 범람으로 수전변전소가 침수되는 등 모든 발전기가 중단됐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재난 상황에 회사는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대거 받아들였다. 이번 복구에 참여한 포항제철소 에너지부 전력계통섹션 박세용 사원은 “침수로 전기 설비, 패널이 진흙에 파묻혀 세척에 어려움을 겪자 공장 고압수를 분사해 해결했고, 수십 대의 가정용 핸드 드라이어를 공수해 건조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우성 전력계통섹션 리더는 “열정과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MZ직원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서준 덕분에 전력 복구의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포항제철소 제강부 MZ 직원들은 정전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소형 수중 펌프 가동에 전기차 배터리를 활용하자는 의견을 냈다. 전기차를 소유한 직원들에게 협조를 구했고, 소형 펌프에 전원을 연결했다. 배수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포항제철소는 전기 인프라 복구를 마치고 사고 6일 만에 모든 고로를 정상 가동해 슬래브 등 반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최주한 2제강공장장은 “많은 직원이 쪽잠만으로 이겨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라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지만 세대를 넘어 전 직원이 함께해서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요 전기 부품의 세척과 건조에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적용됐다.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직원들은 공장의 정상 가동에 필수 요소인 분산제어시스템(DCS), 제어용 기판(PCB) 등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건물 입구에 설치된 신발털이 기계에서 에어컴프레서를 별도로 분리해 작업했다. 또 제철소 내 목욕탕에 설치된 의류 건조기를 가져와 기판에 따뜻한 바람을 쐬어 남은 수분을 빠르게 건조했다. 가정용 의류 건조기와 농업용 고추 건조기도 동원됐다. EIC기술부 한 직원은 “아이디어를 내는 게 말은 쉽지만 막상 실행하려 하면 쉽지 않은 일”이라며 “낮에는 기판 세정 작업에 집중하고 퇴근 무렵 고추건조기에 기판을 넣어 작업 속도를 높였다”고 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