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정밖청소년 보고서] 어른 없는 세상에서 어른을 만나는 법

어른 없는 세상에서 어른을 만나는 법. /GettyImagesBank

더나은미래, 민간단체 10곳 대상 FGI 진행
현장 전문가들 “가정밖청소년 규모 수십만 명 될 것”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마약·도박 등 범죄에 노출

박영미 7R청소년공감센터장은 얼마 전 경기 모 지역에 있는 조폭 두목을 만나고 왔다. 센터에서 돌보는 아이들이 조직원 명함을 받아온 게 화근이었다. 폭력 조직에 가입하면 300만원을 주겠다며 아이들을 꾀어냈다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두려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도를 했어요. 두목과 대면해 ‘우리 애들이 아직 어리니까 접근하지 말아 달라’고 차분하게 말했어요. 좋게 얘기하다 안 돼서 알고 있는 기업인, 정치인 이름을 다 댔죠. 이 사람들 다 내 지인이니까 애들 건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고요. 지금 생각해도 떨리네요.”

경기 광주 지역 ‘가정밖청소년’들 사이에서 박 센터장은 유명인이다.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돌보는 아이들은 12명이지만, 연락하고 지내는 아이들은 수십 명이다. 문제가 생겨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면 박 센터장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친구가 자살하려고 할 때도 박 센터장을 찾는다.

“애들이 저에 대한 확신이 있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주고, 지지해 줄 거라는 확신이요. 부모한테 학대당하고 무시당했어도 어른 한 명에게만 사랑을 받으면 애들은 변해요. 문제 행동이 확실히 줄어요. 이걸 우리 센터의 ‘실적’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알잖아요. 애들이 제게 보내는 진심을요.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저버리겠어요.”

어른 없는 세상에서 어른을 만나는 법.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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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정밖청소년’은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로 통한다. 정부는 가정밖청소년의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정밖청소년을 위한 유일한 안전망인 ‘쉼터’조차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아이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는 건 민간단체들이다. 오랜 기간 가정밖청소년을 돌보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설루션을 만들어가고 있다. 성공 모델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더나은미래는 가정밖청소년과 이들을 돕는 단체들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2월 3일부터 17일까지 관련 단체 10곳을 대상으로 FGI(Focus Group Interview)를 진행했다. 참여 단체는 ▲7R청소년공감센터 ▲겨자씨선교회 ▲별을만드는사람들 ▲선한울타리 ▲씨드센터 ▲위키코리아 ▲이랜드재단 ▲조이토피아 ▲청소년행복재단 ▲포천하랑센터(단체명 가나다순) 등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아이들

가정밖청소년이란 물리적으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가 없거나 정서적으로 믿고 기댈 만한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을 가리킨다. 둘 중 하나라도 결핍될 경우 가정밖청소년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2019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최초로 가정밖청소년 규모를 추산해 발표했다. 청소년쉼터 입소자 수와 경찰청의 실종 아동 및 가출인 신고 건수를 9~18세 전체 청소년 숫자에 대입해 계산한 결과 가정밖청소년 수가 5만6000명 정도 될 것이란 추산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 규모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게 현장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FGI를 통해 만난 현장 전문가들은 가정밖청소년 규모를 최소 수십만 명으로 내다봤다. 박지순 조이토피아 대표는 “친구 집에서 지내는 경우, 모텔이나 고시원 등을 전전하는 경우까지 합하면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라며 “민간단체들 사이에서는 가정밖청소년 수가 6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했다.

정부는 청소년복지지원법에 따라 가정밖청소년을 지원하고 있다. 가정밖청소년이 24시간 머물 수 있는 청소년쉼터는 2023년 2월 기준 전국 137개소다.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청소년은 1367명이다. 전문가들 말대로 가정밖청소년 규모가 수십만 명이라고 가정하면 쉼터에 입소할 수 있는 인원은 전체 가정밖청소년의 1%도 안 되는 셈이다. 나머지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정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은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거주지를 노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정밖청소년들은 생활비를 벌려고 일을 시작한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배달 아르바이트다. 현금을 매주 정산받을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문제는 사고 위험도 크다는 것이다. 박영미 7R청소년공감센터장은 “돈이 아까워 보험도 안 들고 오토바이를 탄다”면서 “그러다 사고가 나면 합의금, 병원비로 큰돈이 나가 결국 수중에 남는 돈이 없다”고 말했다. 돈을 더 빨리, 많이 벌기 위해서 성매매나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에 휘말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마약 범죄도 늘어나는 추세다. 임귀복 위키코리아 대표는 “국내 마약 유통이 늘면서 청소년들이 마약 배달책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순 조이토피아 대표는 “청소년들이 힘든 현실을 잊으려고 마약이나 술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며 “마약 부작용은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당장은 드러나지 않더라도 5년 정도 지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올해 안으로 마약 중독 예방 센터를 개소할 계획이다.

어른 없는 세상에서 어른을 만나는 법.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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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어른’을 만나다

“1년만 더 살아보고 자살하려고요. 별로 살고 싶지 않아요.”

보육원 출신 박모(24)군은 항상 무기력했다. 그만 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른을 향한 적개심이 높아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만 18세에 보육원을 퇴소한 박군은 교회 자원봉사 단체인 ‘선한울타리’와 연결됐다. 선한울타리는 박군에게 주거 공간을 제공하고 교인 부부를 멘토로 연결해 줬다.

멘토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장을 보고 밥을 먹어도 돌아서고 나면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밥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필요한 건 없는지, 부부는 틈만 나면 박군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었다. 박군도 조금씩 변했다. 대학교 패션학과에 진학한 뒤 경제적,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도 멘토들을 찾기 시작했다. 박군은 “차갑게 굴고 잘못한 게 많아서 안 도와주실 줄 알았는데 감사하고 죄송했다”면서 “처음으로 기댈 수 있는 어른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선한울타리는 성공적인 가정밖청소년 지원 모델로 꼽힌다. “한 교회에서 최소 2명의 자립준비청년을 돌본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사업을 펼친다. 교회 인근에 투룸을 얻어 자립준비청년에게 숙소로 제공하고 교인을 멘토로 연결해 준다. 멘토와 멘티의 만남에서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2015년 시작해 지금은 교회 12곳이 이 모델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최상규 선한울타리 대표는 “지금까지 가정밖청소년 90여 명이 멘토를 만났고 이 중 상당수가 경찰관, 9급 공무원, 헤어디자이너 등 어엿한 직업을 얻어 자립했다”면서 “참여 교회 수를 100곳까지 늘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가정밖청소년을 위해 ‘대가족’ 형태의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도 있다. 청소년행복재단에서는 가족형 ‘다중 멘토링’을 제공한다. 재단 직원과 후원자, 전문 멘토 등 최소 3명이 한 아이의 멘토가 된다. 이 중에는 ‘빅브라더’라고 불리는 가정밖청소년 선배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정밖청소년을 돌보는 형태라서 멘토의 소진을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모델은 윤용범 청소년행복재단 총장이 설계했다. 윤 총장은 “가정밖청소년은 ‘답이 없는 아이들’이라는 시선이 여전하지만, 34년간 법무부 소년보호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면 언젠가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가정밖청소년들은 공통적으로 ‘불안’과 ‘불신’을 안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어른에게 수없이 거절당했으니까요. 경제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끝없는 관심으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이토피아는 가정형 단체다. 지금은 가정밖청소년 3명이 박지순 대표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박 대표는 “소년원 등 소년 보호 시설 멘토링을 다니다 눈에 밟히는 아이들이 있으면 퇴소 후에 집으로 데려와서 보듬고 산다”고 했다. “밖에서 사고 치고 온 아이들을 대신해 피해자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며 합의 본 적도 많아요. 경찰서도 셀 수 없이 드나들었죠. 아이들을 혼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변합니다. 제가 데리고 산 애들은 다 잘돼서 나갔어요.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고. 나가서도 여기서 받은 사랑을 잊지를 못해요. 그래서 더 나빠지지 않아요. 참 신기하죠.”

어른 없는 세상에서 어른을 만나는 법.

돕는 자를 돕는다

더나은미래는 FGI 결과를 바탕으로 가정밖청소년 민간 지원 모델의 스펙트럼을 총 3세대 5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주거’에 ‘멘토링’이 강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게 국내 가정밖청소년 지원 단체들의 공통점이었다.

1세대는 ‘아웃리치형’과 ‘가정형’이다. 이 유형의 경우 대표 1인과 직원 1~2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이 많다. ‘아웃리치형’ 조직은 가정밖청소년들이 있을 법한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다. 주로 쉼터, 소년원 같은 보호 기관에 속하지 않은 노숙 청소년이나 가출팸 청소년과 접촉한다. ‘가정형’은 일반 가정집에서 보호자가 자녀를 보살피듯, 소수의 청소년을 장기간 돌보는 형태다. 가정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청소년들이 충분한 관심을 받으면서 정서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다.

1세대에 속하는 단체들은 재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현장으로 찾아다니는 ‘아웃리치형’의 경우 돈과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인력 부족을 겪는다. ‘가정형’은 아이들과 밀착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직원들이 정서적 소진을 빈번하게 겪는다.

2세대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유형으로 ‘교회형’과 ‘재단형’이 여기에 해당한다. 1세대보다 조직화한 형태이며 협력과 확장이 잘되는 편이다. ‘교회형’은 교회의 물적·인적 인프라를 활용해 가정밖청소년을 지원한다. 가정밖청소년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형’은 비교적 체계화된 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고 투명한 지원을 제공한다. 공공·민간 기업, 교회, 의료·법률 단체 등 다양한 조직과 협력도 다른 유형보다 원활하다. 청소년 한 명에게 멘토 여러 명을 연결해 주는 등 멘토링 방식에 대한 시도도 다양하게 일어난다. 현장에서는 1세대와 2세대 조직들이 공존하면서 가정밖청소년을 돕고 있다.

민간 지원에도 한계는 있다. 각 조직이 점조직 형태로 활동하다 보니 정보가 분산돼 있고 자원도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직 간 네트워킹도 어렵다.

최근에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3세대 ‘플랫폼형’ 조직이 등장했다. 이랜드재단은 가정밖청소년을 재단의 핵심 사업 분야로 선언하고 지원 단체들을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청소년을 직접 지원하는 게 아니라 청소년을 돕는 단체들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는 “전국에 있는 다양한 유형의 가정밖청소년 지원 조직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결과, 공통적으로 원하는 부분이 ‘연대’와 ‘네트워킹’이었다”면서 “단체들이 교류하며 정보를 나누고 필요한 지원도 받아가는 플랫폼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황원규 기자 won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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