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일)

“암 경험자를 세상 밖으로… 따뜻한 실험실이 열립니다”

“암 경험자를 세상 밖으로… 따뜻한 실험실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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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경험자 사회 복귀 플랫폼
사회적협동조합 ‘온랩’ 탄생

‘암밍아웃’. 자신이 암 경험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일을 뜻하는 표현이다. 암 병력(病歷)을 주위 사람들에게 밝히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성적 지향을 밝히는 ‘커밍아웃’에 빗댄 말이다. 암을 ‘죽음의 병’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시선은 당사자들의 사회 복귀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지난해 국립암센터와 대한암협회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암 경험자의 직장 복귀율은 30.5%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6일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사회적협동조합 ‘온랩’이 설립됐다. 암을 겪은 당사자를 비롯해 심리치료사, 가수,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 등 각계 전문가로 이뤄진 개인 13명과 법인 4곳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지난 2일 온랩의 정승훈(32) 이사장과 서정주(45) 코디네이터를 서울 선유동에서 만났다.

사회적협동조합 온랩의 정승훈(왼쪽) 이사장과 서정주 코디네이터. 이들은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아픔을 겪은 사람들도 받아들이는 포용 사회로 나가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한준호 C영상미디어 기자

사회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실험실’

온랩을 설명하려면 2015년 시작된 ‘나우 프로젝트’부터 짚어야 한다. 나우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20여 기관의 협력 프로젝트로, ‘나를 있게 하는 우리’라는 뜻이다. “나우는 장애인·시니어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에 나갈 용기를 얻도록 돕는 프로젝트예요. 당사자들이 직접 쓴 가사로 합창하고 훌라춤을 추죠. 해마다 주제를 정해 활동했는데, 2018년은 ‘암 경험자’였어요. 당시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를 위한 활동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이 모이면서 ‘온랩’을 만들게 된 겁니다. 온랩은 ‘따뜻한 사람들의 실험실’이라는 뜻이고요.”(서정주)

온랩이라는 이름으로 첫 모임을 시작한 건 지난 2018년 6월. 약 서른 명이 모임을 시작했다. 가수·법률가·심리치료사·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암 경험자와 지지자가 매월 한 번씩 모였다. 서정주 코디네이터는 제약회사인 한국에자이 인사팀 소속이었고, 지난해 9월 온랩에 합류한 정승훈 이사장은 암 경험자 멘토링 제공 사회적기업인 윤슬케어 운영자였다. ‘암어모델’(패션쇼), ‘암밍아웃’(출판), ‘암파인니팅클럽’(뜨개질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정승훈 이사장은 “온랩은 암 경험자인 자신을 긍정하고 사회로 복귀할 방법을 찾는 ‘실험실’”이라고 했다. “암 경험자는 심리적, 실제적 차별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암 경험자여도 괜찮다’고 자신을 긍정하면서 사회를 바꿔갈 방법을 찾는 게 가장 먼저였죠. 지금은 온랩에서 용기를 얻고, 패션쇼 사진으로 만든 달력이나 출판물을 지인에게 나눠주며 ‘암밍아웃’하겠다는 사람도 많아요. 무엇보다 우울한 얼굴로 참여했던 멤버들의 얼굴이 환해졌어요. ‘암 덕분에 배운 것도 많다’고 할 정도로요. 기쁜 일이죠.”(정승훈)

온랩이 정식 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한 건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는 신호다. 서 코디네이터는 “스스로를 ‘특공대’라고 칭할 정도로 멤버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단순 모임으로는 회의 장소 대관조차 어려웠다”며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법인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고 했다. 법인 형태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공공성을 지킬 수 있게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정했다. 암 경험자이면서 관련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정승훈 대표가 자연스레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개인 넘어 사회 변화 필요해

두 사람은 “착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정 이사장은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는 기업과 정부 정책 등이 함께 변화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혈액암을 앓았던 그는 기업에서 암 경험자 채용을 꺼리는 탓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치료를 마치고 취업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면접장에서 ‘암이 재발하면 어떡하느냐’는 식의 질문이 쏟아졌다. 결과도 좋지 않았다.

“치료법이 발전하면서 암 자체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제도나 편견이 여전히 암 경험자들을 무겁게 누르고 있어요. 아예 법으로 질병만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거나, 업무 재배치가 가능하도록 규정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결국 경력 단절, 경제적 어려움, 자존감 하락이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져요. 암 경험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걸 시작으로, 사회 변화까지 이끌어내야 합니다.”(서정주)

온랩은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 플랫폼’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 중이다. 네트워킹 모임, 합창단과 뜨개질 등 기존 활동을 이어가면서 법인격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나우 총감독으로 활동하는 가수 이한철씨가 만든 ‘나우뮤직랩’과는 문화 콘텐츠 분야 협력을 위한 MOU도 체결했다.

“암 경험자의 자존감 향상과 편견 해소를 위한 문화 콘텐츠 개발은 저희의 특장점이니 꾸준히 해나갈 겁니다. 심리 지원과 네트워킹 프로그램도 확대하고, 암 경험자를 위한 기업 사회공헌 컨설팅도 계획하고 있어요. 소셜벤처 ‘잇마플’과 함께 암 경험자들을 위한 식단도 개발하기로 했죠. 계획을 읊자면 끝도 없습니다(웃음).”(서정주)

정 이사장은 온랩을 “암 경험자 사회 복귀를 위한 통합 기획사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장기적인 목표는 암 생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기금을 만드는 것이다. “심리 치료, 경력 단절, 식단 등 암 경험자들의 사회 복귀는 전적으로 개인 부담으로 남겨져 있어요.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한 사람들이 지금 암을 겪는 사람을 도우려고 해도, 생업이 바쁘니 참여하기 어렵죠. 하지만 분명히 ‘내 아픔을 통해 남을 돕고 싶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따뜻한 연결’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게 온랩이 하려는 일입니다.”(정승훈)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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