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다 노숙인
K에게 집이 생겼다.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과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싱크대가 있는 5평짜리 작은 원룸. K는 그곳을 ‘알토란 같은 내 집’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점잖은 말투. 서울 마천동 주택가의 한 건물에서 만난 K는 동네에서 오며 가며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술에 절어 거리를 전전하고 찬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K를 ‘노숙자’라고 불렀다. 2004년에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여섯. 노숙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꽤 전형적이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 다니던 직장이 망했다. 치킨집도 차려보고 택시 운전도 해봤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에 술과 도박에 빠졌고 이혼으로 이어졌다. 전세금 빼서 술 마시고, 월세도 밀리게 되자 거리로 나갔다. 영등포역 노숙인들과 술 먹고 어울려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들과 같은 모습이 돼 있었다.
대부분의 노숙인이 그렇듯 K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을 앓았다. 막노동을 하고 일당을 받아 술을 사 먹었다. 하루 소주 4~5병은 예사로 마셨다. 계속된 노숙 생활로 몸이 망가지면서 치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두 개 빠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치아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해 80㎏이던 몸무게가 60㎏으로 줄었다.
노숙인 시설로 들어간 건 2006년. 7~8명이 한방에서 생활했다. 술은 철저히 통제됐다. 외출도 외박도 안 됐다. 시설 입소 노숙인들은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해 다시 거리로 뛰쳐나갔다. K도 술이 먹고 싶어서 중간에 한번 도망쳤다 다시 입소했다. 이를 악물고 2년을 버텼다. 틈틈이 일해 모은 돈 250만원을 들고 의기양양 시설에서 나왔다. 고시원을 얻어 독립했지만 술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다시 술독에 빠졌다. 거리를 떠돌다 시설에 입소하고 퇴소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거의 모든 노숙인이 겪는다는 ‘회전문 현상’. 거리-시설을 맴도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2 집을 준다고?
‘지원주택’〈키워드〉 이야기를 들은 건 시설 생활을 하던 2016년이었다. 사회복지사가 K를 불렀다. 서울시가 노숙인에게 집을 준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탐탁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어중간하게 나가서 생활해봤자 또 망가지기만 하겠지.’ 몇 번의 실패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사회복지사는 집 구경이나 해보자며 그를 차에 태웠다. 5층짜리 건물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원룸이지만 예전에 살던 고시원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었다. 2017년 5월, K에게 집이 생겼다.
K가 입주한 마천동 지원주택에는 총 19가구가 살고 있다.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지를 떠돌던 남성 노숙인들이다. 1층 커뮤니티 공간에는 입주자들의 독립생활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배치돼 있다. K도 입주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구청에 수급 신청을 하러 갈 때, 공과금을 납부할 때, 아파서 병원 갈 때, 우울증이 심해져 상담이 필요할 때, 외로워 말동무가 필요할 때 사회복지사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한다.
지원주택에 입주하면 더는 ‘관리 대상자’가 아니다. 사회복지사도 이들을 ‘입주자’로 대한다. 원룸은 완벽한 개인 공간으로 유지된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간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다. 집 안에서 술을 마시든 무엇을 하든 자유다.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노숙인을 방에 혼자 두면 사회 복귀는커녕 상태가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마천동 지원주택을 담당하는 윤치상 비전트레이닝센터 사회복지사는 “초기에는 방에 틀어박혀 종일 술만 마시려는 입주자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게 일이었다”고 말했다.
10만~15만원가량의 월세는 입주자가 부담해야 한다. 전기, 수도, 가스 요금, 휴대폰 요금 등도 개인이 낸다. 월세나 공과금을 내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건강 상태에 맞는 일을 자연스럽게 찾아 하게 되는 구조다. K는 집 근처 냉면집에서 매일 3시간씩 주차 관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차곡차곡 저축한 돈으로 얼마 전에는 집에 에어컨을 달았다. 얻어 쓰는 것보다 직접 사서 쓰는 게 더 ‘내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3 회전문을 벗어나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노숙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의 노숙인 수는 3478명이었다. 거리 노숙인이 731명, 시설 노숙인이 2747명.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노숙인까지 합하면 실제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내 노숙인 시설은 총 43개소로, 39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통계에 잡힌 노숙인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자리가 넉넉하지만, 입소 인원은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단체 생활에 대한 부담으로 입소를 꺼리는 노숙인이 많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시설에 들어와 치료를 받고 독립을 하더라도 실패해 되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윤치상 사회복지사는 “노숙인 자활시설에서는 2년 머물고 퇴소하는 것이 원칙인데, 퇴소 후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케이스는 거의 본 적이 없다”면서 “이르면 한두 달, 늦어도 1~2년 안에 시설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시설은 임시방편일 뿐 노숙인을 ‘탈(脫)노숙’에 이르게 하거나 사회로 복귀시키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울시의 지원주택 실험은 성공했다. 마천동 남성 노숙인 지원주택의 경우 입주자의 50%가 2년 이상 독립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19가구 중 2가구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절망의 회전문을 벗어난 셈이다.
지원주택이 노숙인 문제 해결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진산 서울시 자활지원과 주무관은 “노숙인 시설을 운영하는 것보다 노숙인에게 집을 주는 게 예산이 훨씬 적게 든다”고 강조했다. 30명 정원에 23명이 입소해 있는 여성 노숙인 자활시설의 경우 연간 운영비로 5억8000만원이 들어간 반면, 여성 노숙인 지원주택의 경우 17명 입주 기준으로 연간 4200만원이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지원주택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은 20년이다. K는 이곳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시설이나 고시원에 살 때는 부끄러워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내 집’이 생긴 뒤 가장 기쁜 순간은 길에서 동네 주민을 만나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눌 때라고 K는 말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장을 보고, 돼지고기 볶아 밥을 지어 먹고, 가끔은 반주도 한다. 딱 소주 반 병.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삶. 그것만 지키며 살고 싶다고 했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지원주택
서울시가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핀란드의 ‘하우징 퍼스트(Housing First·주택 우선)’ 정책을 벤치마킹해 시작한 사업이다. 집이 없는 노숙인에게 치료나 자활이 아니라 ‘집’을 먼저 제공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집만 주는 게 아니라 노숙인의 자립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를 배치하는 것이 지원주택 사업의 핵심이다. 2016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진행된 지원주택 시범 사업에 공기업과 민간도 힘을 보탰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여성 노숙인과 남성 노숙인이 생활할 수 있는 주택 2채를 확보했고, 이랜드복지재단은 노숙인의 원룸 보증금을 내줬다. 한 집당 300만원씩, 총 38호(號)에 1억1400만원을 지원했다. 서울시는 올해 노숙인 지원주택을 100호 더 늘리는 등 5년 안에 500호를 확보할 계획이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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