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공전하는 ‘유산기부’… 이제는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한국형 ‘레거시 10′<3>
[인터뷰] 김희정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사무총장

“영국에서 유산기부가 전체 모금액의 30%를 차지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매우 놀라웠습니다. ‘신세계’ 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인식과 제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기부 문화 탐방을 위해 영국을 찾은 김희정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현지 자선단체의 재원 구조를 살펴보다 낯선 항목과 마주했다. 당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던 ‘유산기부’였다. 전체 모금액의 30%를 차지한다는 설명은 당시 국내 기부 현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김 총장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념조차 없던 유산기부가 선진국에서는 주요 재원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기부문화 탐방을 위해 영국을 방문한 김희정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의 모습. /한국자선단체협의회

하지만 그 충격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는 유산기부를 전담하는 조직도, 이를 하나의 제도로 논의할 기반도 없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19년 6월, 한국자선단체협의회는 국회기부문화선진화포럼과 공동으로 ‘영국의 유산기부 Legacy10 국내 도입을 위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영국의 유산기부 전문가들을 초청해 제도 도입의 타당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김 총장은 “당시 세미나 이후 단체장들과 함께 영국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유산기부 제도를 본격적으로 준비해 보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장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국내 유산기부는 여전히 여러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김 총장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유산기부가 가진 독특한 운영 구조부터 짚어보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더나은미래>는 김 사무총장을 만나 유산기부가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한 이유와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들었다.

◇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유산기부 도입을 향한 첫 실험

2019년은 김 총장에게 사실상 ‘유산기부 원년’으로 기록된다. 그해 1월, 김 총장은 밀알복지재단, 초록우산, 굿네이버스 등 국내 주요 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단순 탐방이 아니라, ‘정말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정탐에 가까웠다. 그는 “가서 유산기부를 잘하는 단체들을 직접 둘러본 뒤, 한국에서도 한 번 시도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일반 시민과 시민사회단체를 연결하기 위한 ‘유산기부센터’를 개설했다. 센터는 유산기부 희망자들의 문의에 대응하고 적합한 단체나 전문가를 연결하는 창구 기능을 맡았다. 동시에 실제 캠페인도 전개됐다. 영국 사례를 참고해 기부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메시지를 담은 홍보 영상을 제작해 방송 매체에 송출했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가 2019년 진행한 유산기부 인식개선 캠페인 ‘나누고 남기다’ 영상 갈무리. /한국자선단체협의회

당시 캠페인은 “당신은 유산을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배우자와 자녀에게 재산을 남긴 뒤에도 그 일부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총장은 “유산기부는 자산가들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깨는 것이 핵심이었다”며 “조의금이나 재산의 일부처럼 작은 규모도 사회적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알리려 했다”고 말했다.

9월에는 원혜영 의원 등이 참여한 국회 행사에서 ‘대한민국 유산기부의 날’ 선포식이 열렸다. 김 총장은 “유산기부는 개별 기관의 활동만으로는 전 국민적 인식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며 “국회와 시민사회가 공동의 장을 만들어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 ‘사후 약속’의 한계… 유산기부, 왜 한국에선 멈췄나

지난 2022년 ‘선진 기부문화·유산기부 스터디 투어’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러한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실무자들은 유산기부 활성화의 어려움으로 성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긴 시차를 꼽는다. 일반적인 기부는 홍보 즉시 모금으로 이어지지만, 유산기부는 기부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집행되는 ‘사후 약속’이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유산기부는 서약을 하더라도 실제 기부금이 들어오기까지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며 “당장의 운영비 대비 성과를 중시하는 단체 입장에서는 전문 인력을 배치하거나 예산을 투자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유언장을 쓰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고 죽음을 기부와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하는 정서적 문턱도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구조적 한계와 정서적 장벽이 맞물린 상황에서 김 총장은 돌파구로 ‘제도’를 지목한다. 특히 영국의 세제 혜택 모델인 ‘레거시 10’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재산의 10%를 기부할 경우 상속세율을 일부 감면해 주는 방식이다.

김 총장은 “영국 재무부는 단순히 세금이 줄어드는 점만 본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직접 정책의 타당성을 조사했다”며 “민간단체가 노숙인 지원이나 난민 돌봄 등 정부 예산이 닿기 힘든 복지 사각지대를 메움으로써 얻는 사회적 이익이 국가 전체의 행정 비용 절감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도 유산기부를 단순한 세제 혜택이 아닌 사회적 비용 절감 체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고령화 시대, 유산은 어디로 향해야 하나

김 총장은 이러한 관점이 국내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봤다.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는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70대 여성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재산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상담을 요청한 사례도 있었다”며 “이처럼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로 인해 유산기부를 고민하는 수요는 분명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배우자나 자녀가 없는 어르신들이 사후 재산 정리와 돌봄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법으로 기부를 문의하는 사례가 현장에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김 총장은 “일본에서는 시민사회단체가 일종의 ‘계약된 가족’ 역할을 하며 병원 동행이나 수술 동의 등 돌봄을 제공하고, 기부자는 그 대가로 유산을 남기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민을 언급하며 “자신이 떠난 뒤 자녀를 돌봐줄 곳을 찾다가 유산기부를 결심하는 부모들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제는 NGO만 인식 개선을 할 일이 아니라, 변호사·회계사·세무사처럼 유언장과 상속을 다루는 전문가들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에서는 유언장을 쓸 때 변호사가 ‘유산기부를 하면 세제 혜택이 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줘도 사람들이 고민하게 된다”며 “결국 유산기부는 NGO만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세제·금융이 함께 얽힌 구조”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단체들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단체들은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일궈온 가치와 사회적 성과를 데이터로 증명해야 한다”며 “기부자가 평생 모은 재산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회계 투명성과 사업의 전문성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유산기부 활성화 법안’(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김 총장은 “유산기부는 단순히 모금액을 늘리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사회에 환원하고 사후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라며 “이번에는 반드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끝까지 전달하겠다”고 전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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