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행정·교육까지… 생활 공간으로 확장되는 ‘스마트 경로당’
AI 기술 보급이 목적 아닌, 필요에서 출발한 노년 복지 모델의 성공 조건
“어르신, 병원에 한 번 가보세요.”
경기도 부천시의 한 경로당. 태블릿 화면에서 흘러나온 인공지능(AI) 음성에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곧이어 차분한 안내 음성이 이어진다. 질문에 답하듯 말을 이어가자, 화면에는 말의 속도와 발음, 억양을 분석한 결과가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음성 인식을 통해 발화의 끊김과 흐름을 살펴 인지 변화 신호를 포착하고, 치매 가능성을 가늠하는 과정이다.

경로당 한쪽에서는 스마트 저울과 혈압계 앞에 어르신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측정 결과는 태블릿에 저장된 뒤 곧바로 보건소로 전달된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면 병원 방문을 권유하는 안내가 이어진다. 부천시 관계자는 “경로당에서 측정된 건강 데이터가 보건소와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어르신 건강 상태를 선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동네 진료소가 경로당 안으로 들어온 듯한 풍경이다.
◇ 디지털 격차, 경로당에서 답을 찾다
이제 경로당은 더 이상 바둑판과 담소에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경로당은 AI를 통해 건강관리·교육·행정 기능을 아우르는 생활 복지의 거점으로 변모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스마트 경로당’이 있다.
스마트 경로당은 노년층이 주로 이용하는 기존 경로당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공간이다. 대형 스크린과 화상 장비, 태블릿 등을 활용해 운동·노래·건강관리 프로그램을 대면과 비대면 방식으로 동시에 운영한다. 2021년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스마트빌리지 확산 사업’의 하나로 추진됐으며, 중앙정부가 일괄 모델을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설계·운영하는 포괄보조사업 형태다.
이 같은 시도가 등장한 배경에는 고령층의 디지털 접근 격차라는 현실이 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2024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55세 이상 고령층의 AI 서비스 이용 역량은 29.1%로 전체 평균(55.3%)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AI 앱이나 기기를 일상적으로 능숙하게 다루는 비율은 23.4%에 불과했다. 기술이 일상 인프라로 확장되는 속도에 비해, 고령층의 체감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는 뜻이다.
정책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어디서 접근하게 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전국 약 6만8000곳에 달하는 경로당은 대부분 주거지 인근에 위치해, 어르신들이 도보로 5~10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 공공 인프라다. 별도의 이동이나 학습 부담 없이, 익숙한 공간에서 건강 측정과 여가, 교육을 한 번에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부천시의 접근은 이 지점에서 출발점부터 달랐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건강 관리라는 생존의 필요에서 출발해, 기술을 ‘배워야 할 과제’가 아닌 일상의 해결책으로 설계했다. 송미령 화성의과대학교 의료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천시는 예산 확보나 기기 보급이라는 결과 중심에서 벗어나, 노인들의 실제 불편이 무엇인지부터 고민한 점이 성공의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현장의 필요에 맞춘 ‘맞춤형 도구’를 제공하자, 기술은 자연스럽게 생활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은 현재까지 전국 35개 지자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부천을 찾을 만큼 주목받고 있다. 2025년 7월 기준 전국 경로당 가운데 약 2000곳이 스마트 경로당으로 전환됐으며,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면 농어촌을 포함한 지역 어디에서나 디지털 접근 거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평가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스마트 경로당은 단순한 여가 공간을 넘어 ▲건강관리 ▲행정 지원 ▲교육이 결합된 복합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경로당에서 행정까지…기술이 바꾼 일상
“처음엔 정말 힘들었는데, 혼자 해보니까 예전이랑 비교도 안 되게 편해요.”
서울 양천구의 한 경로당. 총무 심재숙 씨(83)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며 웃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경로당 회계는 잃어버린 영수증과 잔돈 때문에 늘 골칫거리였다. 이제는 ‘마을살림e’ 앱으로 영수증을 찍기만 하면 AI가 수입·지출 내역을 자동으로 정리한다. 양천구는 이 시스템 도입 이후 행정 업무 효율이 최대 60% 개선됐다고 설명한다.

경로당의 풍경도 달라졌다. 지난 16일, 양천구 신월동 신원경로당 벽면의 대형 화면이 켜졌다. 화면 속 강사가 출석을 부르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간다. “저희 여기 있어요!” 화면에는 여러 지역 경로당이 작은 창으로 나뉘어 나타났다. 이날 동시에 연결된 곳만 여덟 곳. 서로 얼굴은 낯설었지만, 같은 동작을 따라 하며 웃음이 오갔다. 박자를 놓친 어르신을 보고 다른 쪽 화면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프로그램은 일방적인 ‘시청’이 아니라 실시간 소통으로 진행됐다. 강사가 질문을 던지면 어르신들이 마이크 앞에 다가가 답했고, 다른 지역 경로당의 반응이 즉각 화면에 잡혔다. 건강 퀴즈 시간이 되자 각 경로당은 답을 적은 종이를 카메라 앞에 들어 올렸다. 정답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왔다.
양천구의 경우 한 차례 프로그램에 최대 15곳의 경로당이 동시에 연결된다. 이 경로당을 자주 찾는 백경희(80)씨는 체조가 끝난 뒤 숨을 고르며 “집에 있으면 이렇게 움직일 일이 없다”며 “여기 수업은 빠지기 아까울 만큼 잘 돼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 경로당은 건강관리와 교육, 소통이 동시에 이뤄지는 복합 복지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스마트 경로당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분명한 조건이 따른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핵심은 ‘기관 간 연계’다. 부천시는 복지관–보건소–시청–경로당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고, 양천구는 동주민센터–구청–경로당을 연결해 데이터를 실제 복지 서비스로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기기를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집된 정보가 행정과 돌봄으로 환류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유성은 국립군산대학교 공간디자인융합기술학부 교수는 “노년층 데이터가 일회성 수집에 머무르지 않고 정책과 서비스로 활용되는 구조가 중요하다”며 “기획 단계부터 지자체 내 여러 기관이 함께 참여해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이 스마트 경로당의 성패를 가른다”고 말했다.
◇ ‘똑똑한 경로당’이 되기 위한 조건
그러나 모든 스마트 경로당이 이런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스마트 경로당은 포괄보조사업 구조로 운영돼 지자체별로 설계와 운영 방식이 크게 다르다. 노인복지·보건·정보화 정책이 각기 다른 부처와 예산 항목에 흩어져 있어, 하나의 공간 안에서 통합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교육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거나, 장비만 설치된 채 활용되지 않는 사례도 나타난다.
실제로 지난해 8월 구축된 수도권의 한 스마트 경로당을 이용하는 김모(79)씨는 “기구는 설치해 놓고 갔는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그냥 두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 강사의 지속적인 배치가 어렵고, 현장 운영을 전담할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반복 학습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유 교수는 “기기 보급이라는 양적 목표가 앞서다 보면, 실제 이용자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시설만 ‘스마트’해지는 경우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예산 역시 스마트 경로당 정책의 중요한 변수다. 초기 구축 단계에서는 디스플레이와 화상 시스템, 네트워크 등 인프라 비용이 집중적으로 투입된다. 정부 사업의 경우 국비가 최대 70%까지 지원되지만, 이후 유지보수와 운영 비용은 대부분 지자체가 감당해야 한다. 매년 반복되는 운영비를 뒷받침할 재정 여력과 행정적 의지가 없다면, 사업은 지속성을 잃기 쉽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표준화된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송미령 화성의과대학교 의료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예산 지원과 함께 프로그램 운영과 공간 설계에 대한 기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지역 간 편차를 줄일 수 있다”며 “단순한 장비 목록이 아니라, 콘텐츠 구성과 교육 방식, 보조 인력 배치까지 포함한 운영 기준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장에서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령층은 디지털 습득 속도가 느리고 쉽게 잊기 때문에, 곁에서 반복적으로 도와줄 인력이 필요하다. 양천구는 노인 일자리 사업과 연계해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어르신을 ‘스마트 매니저’로 채용했다. 이들은 하루 3시간씩 경로당에 상주하며 화상 프로그램 연결과 기기 사용을 돕고, 참여를 주저하는 어르신들을 독려한다.
다만 인력을 무작정 늘리지는 않는다. 양천구 관계자는 “올해 스마트 매니저 인원이 지난해 29명에서 15명으로 줄었다”며 “이미 기기 활용이 안정된 경로당은 어르신들의 자생력이 높아진 점을 고려해 인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는 ‘지속적 검증’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회성 교육이나 시설 설치에 그치지 않고, 실제 활용으로 이어지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천시는 헬스케어 측정 횟수와 참여 인원 등을 지표로 관리하며, 연 2회 경로당별 설문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기술이 체험에 머무는지,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수치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부천시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 만족도 조사에서 90.7점을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지표가 확인됐다”며 “이러한 결과가 스마트 경로당 확대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AI 기술이 접목된 스마트 경로당은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한국에서 표준 노인복지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실제 성과가 연구와 지표로 축적될 경우, 노년층의 디지털 참여를 넓히는 디지털 포용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권아인(한양대 정치외교학 4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박선윤(한양대 정치외교학 4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양희유(한양대 사회학 3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 이 기사는 한양 SSIR Korea 센터와 더나은미래가 공동주최한 ‘솔루션 저널리즘 프로젝트’와 연계해 작성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