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의사회 “국제인도법상 의료 보호 원칙, 현장에서 붕괴”
전 세계 무력 분쟁 지역에서 의료시설과 의료진, 환자, 구급차량이 공격 대상이 되는 사례가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국제인도법(IHL)이 규정한 의료체계 보호 원칙이 현장에서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최근 보고서 ‘공격 목표물이 된 의료지원(Medical Care in the Crosshairs)’을 통해 “의료시설과 의료진에 대한 공격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분쟁의 구조적 일부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분쟁 당사자들이 국제인도법상 보호 의무를 점점 더 경시하고 있으며, 의료 지원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전략이 확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의료시설 공격 감시 시스템(SSA)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의료시설 공격은 1348건 발생했고, 이로 인해 1981명이 숨졌다. 전년도인 2024년 사망자 수(944명)의 두 배를 넘는 규모다. 국가별로는 수단이 1620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미얀마(148명), 팔레스타인(125명), 시리아(41명), 우크라이나(19명)가 뒤를 이었다.
보고서는 특히 최근 분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을 지적한다. 과거에는 의료시설 공격이 ‘오폭’이나 ‘정보 오류’로 설명됐지만, 이제는 분쟁 당사자들이 의료시설과 의료진이 국제인도법상 보호 지위를 상실했다는 논리를 내세워 공격을 정당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에릭 라안 국경없는의사회 옹호활동가는 “군사적 필요성이 민간인 보호보다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며 “사전 경고 제공과 같은 핵심 의무조차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시설이 오히려 스스로 군사적 표적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분쟁지역 의료보건 보호 연합(SHCC)’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의료시설을 향한 공격은 3623건으로 2023년 대비 15%, 2022년 대비 62% 증가했다. 이 가운데 81%는 국가 주체가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켈 곤잘레스 국경없는의사회 스페인 코디네이터는 “국가 주체는 공중 폭격 등 대규모 살상 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며 “의료체계와 인도적 지원에 대한 공격은 필수 의료 서비스 중단과 구호단체 철수로 이어져 주민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고 경고했다.
국제 구호활동가 안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021~2025년 사이 전 세계에서 현지 채용 구호활동가 1241명이 사망하고, 1006명이 부상했으며 604명이 납치됐다. 이는 같은 기간 발생한 전체 구호활동가 피해 가운데 사망자의 98%, 부상자의 96%, 납치자의 94%를 차지한다.
2015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쿤두즈 외상센터가 미군 AC-130 공습으로 파괴돼 42명이 숨진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국경없는의사회 직원 14명도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의료시설과 의료 인력 보호를 명시한 결의안 2286호를 채택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의료체계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다.
에릭 라안 활동가는 “모든 교전 당사자는 의료시설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고, 의료 임무 보호를 군사 규범과 의사결정 과정에 명확히 통합해야 한다”며 “국가들은 독립적인 사실 조사단을 수용하고 조사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