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정기 후원과 함께 팔찌나 반지, 목걸이 등 ‘굿즈(Goods)’를 받는 방식이 보편화되며, 보이지 않던 기부는 이제 물건의 형태로 손에 잡히고 일상 속 소비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굿굿즈는 비영리단체의 주요 모금 전략으로 자리 잡았지만, ‘굿즈 없는 기부는 가능한가’, ‘기부가 소비로 인식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도 뒤따릅니다. <더나은미래>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공익 씽크탱크 그룹 ‘더미래솔루션랩’과 함께 ‘굿 굿즈’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와 국내 대표 비영리단체 6곳(유니세프, 세이브더칠드런, 기아대책, 밀알복지재단, 굿네이버스, 굿피플) 인터뷰를 토대로 특별 기획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굿굿즈는 최선의 마케팅일까요, 아니면 다시 고민할 시점일까요. ‘더 건강한 기부문화’를 위한 다섯 편의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팔찌로 시작된 기부 캠페인, 이제는 디자인 넘어 메시지를 묻는다
후원 문턱은 낮췄지만, 변곡점에 섰다는 분석도
2004년, ‘노란 고무팔찌’ 하나가 전 세계 기부 문화를 바꿔놨다. 미국 리브스트롱 재단이 나이키와 함께 만든 암 환자 지원 팔찌는 출시 10년 만에 8000만 개가 팔렸다. ‘팔찌를 사면 기부가 된다’는 구조는 곧 글로벌 캠페인 공식처럼 퍼져나갔다. 국내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제작된 ‘희움 의식팔찌’가 이 흐름을 이었다. 2012년 처음 출시된 이 팔찌는 2년 만에 11만 개 이상 판매됐다.

고무팔찌나 실팔찌처럼 단순한 물품에 메시지를 담는 것이 ‘굿 굿즈(Good Goods)’ 1.0 시대였다면, 변화는 2017년, 유니세프가 정기기부자에게 증정한 ‘호프링’에서 시작됐다. ‘FOR EVERY CHILD, HOPE’라는 문구가 새겨진 은색 반지는 단순한 기부 사은품을 넘어 주얼리와 정체성을 결합한 ‘굿 굿즈 2.0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기성 브랜드 못지않은 디자인에 중고 거래 시장에서도 웃돈이 붙었다.
이후 여러 NGO 단체들이 팔찌, 반지,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앞세운 굿 굿즈 캠페인을 잇달아 내놓으며, 본격적인 ‘2.0 시대’가 열렸다. 이제 굿 굿즈는 NGO 광고의 ‘얼굴’로 등장하고 있다. 실제 누구나데이터의 ‘빅데이터 모금 트렌드 2025’ 따르면, 지난해 4분기 70개 비영리단체가 진행한 총 254개의 디지털 모금 캠페인 중 90개(35%)가 굿즈 캠페인이었다.
현재 개인 기부금 모금 상위 10개 단체 중 8곳(▲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유니세프 ▲초록우산▲세이브더칠드런 ▲밀알복지재단 ▲희망친구 기아대책 ▲굿피플)이 굿굿즈 모금 캠페인을 운영하거나, 최근까지 진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월 2만~5만원 정기기부를 새롭게 신청하면 팔찌, 목걸이, 반지 등 액세서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기존 후원자에게는 일시기부를 할 경우, 굿즈를 제공하기도 한다.
◇ 기부 굿즈, 누가 어떻게 만들까
굿굿즈 제작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톤헨지, 제이에스티나 등과 같은 주얼리 브랜드와 협업하는 방식이다. NGO가 캠페인 방향을 먼저 정하면, 기업이 디자인을 제안하거나 공동 기획한다. NGO는 ‘기업의 인지도’를 얻고, 기업은 ‘착한 이미지’를 가져간다. 일종의 ‘선한 브랜딩 협업’이다.
다만, 파트너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난항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얼리 업체와 협업한 경험이 있는 NGO 관계자는 “굿즈 캠페인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도 협력 업체 선정”이라며 “NGO와의 협력을 원하는 동시에 기관 및 모금 캠페인과 결이 맞는 주얼리 업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전했다.
다른 방식은 NGO가 자체적으로 기획부터 디자인, 제작까지 맡는 것이다. 반지와 팔찌를 직접 제작하는 유니세프는 하나의 캠페인을 위해 약 1년을 투자한다. 김한송 유니세프 후원본부 디지털마케팅팀장은 “비용 최소화를 위해 직원들이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액세서리 트렌드를 살피고 재료를 선정한다”며 “후원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만한 요소를 굿즈에 녹여내기 위해서 직접 기획하고 그에 맞게 디자인 작업까지 자체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세이브더칠드런 또한 팔찌를 제작할 때 내부 직원 의견을 반영해 팔찌 디자인을 만들고, 단가와 물량을 고려해 제작처를 정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규모의 벽에 부딪힌다. 중형 모금 규모의 NGO 관계자는 “브랜드 인지도가 없는 중소 NGO는 자체 제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결국 모금 굿즈는 대형 기관의 전유물이 된다”고 지적했다.
◇ 팔찌 하나로 기부 문턱 낮추기도
굿굿즈는 후원자의 마음을 여는 ‘열쇠’ 역할도 한다. 유니세프는 기부자를 ‘유니세프 팀’이라 부르며, 팔찌를 통해 소속감을 강화한다. 조종현 유니세프 후원본부장은 “기존엔 수혜자 중심 콘텐츠였지만, 이제는 후원자의 경험과 감정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모금 굿즈의 또 다른 장점은 기부의 문턱을 낮춘다는 점이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 긴급구호 기부 팔찌 ‘세이브원’ 출시 이후 관련 기금 후원이 최소 50% 이상 증가했다. 최지희 세이브더칠드런 나눔마케팅부문장은 “긴급구호 기금은 미래의 재난에 대비해 사전에 재원을 마련하는 기금이라 홍보가 쉽지 않아 기부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세이브원 팔찌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기부를 성공적으로 끌어냈다”고 말했다.
굿네이버스는 MZ세대를 타깃으로 TF 형태로 ‘유어턴링’ 캠페인을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아 전담 팀으로 승격시켰다. 익명의 전직 관계자는 “기부 시장에서 굿즈에 대한 수요가 명확해, NGO가 그걸 외면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굿굿즈 열풍이 계속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기부자의 관심은 정점을 찍은 뒤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누구나데이터의 ‘빅데이터 모금 트렌드 2025’에 따르면, ‘기부 굿즈’ 관련 검색량은 최근 5년 사이 30% 이상 감소했다. ‘기부·후원 팔찌’ 키워드는 2016년 전체 검색량의 49%로 정점을 찍은 뒤 꾸준히 하락해, 2024년에는 18% 수준에 그쳤다. ‘기부·후원 반지’도 2019년 19%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올해는 15%를 밑돌았다.
김자유 누구나데이터 대표는 “이는 기부 굿즈가 초기 단계를 지나 보다 안정된 시장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다”며 “기부자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지, 단체만의 색깔을 담은 굿즈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신규 후원자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며 굿즈가 하나의 유입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굿즈가 만능은 아니기에 결국 기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후원 지속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규리·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