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6일(수)

고아원 없앤 영국·스위스,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해답은 [아산 프론티어의 시선]

임수진 희망친구 기아대책 임팩트사업팀 팀장

2023년 보건복지부 자립지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립준비청년 2명 중 1명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고, 약 10%는 고립·은둔 상태에 있다.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이 겪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복지 선진국 영국과 스위스를 찾았다.

두 나라는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와 체계적인 보호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과 제도를 배우고 한국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해답을 찾는 것이 이번 여정의 목적이었다.

◇ 영국과 스위스에선 이미 사라진 ‘고아원’

영국과 스위스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대규모 고아원을 없애고 소규모 돌봄시설과 위탁가정으로 보호 체계를 전환했다. 1980년대부터는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 2022년이 되어서야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하며 변화의 첫걸음을 뗐다.

이번 방문에서 만난 비영리기관 ‘월드 위드아웃 오펀스(World Without Orphans·이하 WWO)’는 가족 기반 돌봄을 원칙으로 빈곤과 폭력 등 가족 해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WWO는 위탁가정과 친족 돌봄, 입양 등을 적극 지원하며, 돌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과 멘토링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WWO 창립 멤버인 바바라 뤼에거(Barbara Rüegger)와 전문가정위탁부모 레귤라 에리스만(Regula Ehrismann). /임수진 희망친구 기아대책 임팩트사업팀 팀장

◇ 부모의 빈자리,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돌봄 필요

“친부모와 함께 살지 않은 모든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경험합니다. 친가족에서 떼어놓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고 이별과 상실을 통해 트라우마는 남습니다. 치유를 위한 대체 가족이 없다면 트라우마는 남습니다.”

영국에서 만난 WWO 유럽 코디네이터 리차드 프록터(Richard Procter)의 말이다. 자립준비청년들은 가족 공동체를 벗어난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부재를 경험한다. 이에 영국 정부는 ‘가족’이라는 안정적 테두리 속에서 장기적인 성인기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관계를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은 아동보호시스템을 통해 보호아동이 위탁가정이나 친인척 가정과 같은 일반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 위탁가정과 법적 보호자들에게는 지속적인 훈련과 모니터링을 제공해 안전한 성장 환경을 마련하고, 이별과 상실의 트라우마를 일대일 관계 속에서 치유하도록 돕는다.

반면 한국의 보호대상아동의 약 40%는 여전히 대규모 시설에서 생활하며 개별적이고 세밀한 돌봄을 받기 어렵다. 대부분 친인척 위탁 중심으로 운영되는 한국의 위탁가정 역시 국가의 체계적 관리와 지원이 부족하다. 영국의 사례는 자립이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가족 관계와 지원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줬다.

WWO 창립 멤버 바바라 뤼에거(Barbara Rüegger)는 스위스의 자립준비청년 정책에 대해 “이들이 특별히 더 심각한 문제를 겪는다고 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누구든 트라우마와 어려움을 겪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애 전반에 걸쳐 세심한 돌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는 위탁가정과 사회복지사들이 긴밀하게 소통하며 아동을 돌보고 모니터링한다. 자립 이후에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며, 단순한 지원 프로그램을 넘어 신뢰와 관계를 기반으로 한 돌봄을 제공한다. 결국 진정한 자립은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진정한 자립의 열쇠는 ‘따뜻한 관계’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한 사람이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수많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한국의 보호대상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이 겪는 문제 역시 단순 보호나 경제적 지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들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과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립이 가능해진다.

WWO 유럽 코디네이터 리차드 프록터(Richard Procter)와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임수진 희망친구 기아대책 임팩트사업팀 팀장

영국과 스위스를 오가며 아동보호 전문가, 사회복지사, 위탁가정 부모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해답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했다. 진정한 자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따뜻한 관계’였다. 지속적인 관심과 신뢰가 쌓일 때 한 개인은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보호대상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이 온전히 자립하려면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 그리고 곁에서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어른과 안정된 가정환경이 꼭 필요하다. 영국과 스위스 같은 복지 선진국의 사례에서도 확인했듯이, 진정한 자립은 제도나 프로그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였다. 우리 사회 역시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신뢰와 사랑이 담긴 공동체를 제공하고, 이들이 든든한 어른과 함께 성장하며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임수진 희망친구 기아대책 임팩트사업팀 팀장

필자 소개

국제구호개발 NGO 분야에서 15년간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와 사업, 연구를 진행해 왔다. 현재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과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고, 연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본 기고문 시리즈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사회혁신가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수강생들이 해외 선진기관 탐방에서 얻은 통찰과 우리나라 소셜섹터로의 시사점을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총 6개의 기고문은 각각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13기 수강생이 각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을 대표해 작성한 것으로, 아산나눔재단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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