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목)

포용의 공간, 도서관의 역할을 다시 묻다

[인터뷰] 김병수 미션잇 대표·문기원 도서문화재단 씨앗 매니저
전 세계 ‘포용적 도서관’ 사례를 조명한 책 발간

도서관은 흔히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공간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도서관이 가진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 누구나 조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공 공간이자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허브의 역할,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장소로 변모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이러한 도서관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현장을 만나보기 위해, 지난달 26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라이브러리 티티섬’에서 김병수 미션잇 대표와 문기원 도서문화재단 씨앗 매니저를 만났다. 인터뷰 당일이 휴관일이라 한층 고요했지만, 이곳의 특별한 장소인 ‘청소년 전용 구역’까지 둘러볼 기회도 얻었다.

지난달 26일 경기도 성남시 라이브러리 티티섬에서 더나은미래와 인터뷰를 한 문기원 도서문화재단 씨앗 매니저(왼쪽)와 김병수 미션잇 대표의 모습. /성남=김용재 영상C미디어 기자

티티섬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콘텐츠 놀이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책들은 무겁거나 근엄하지 않았다. 책들은 아이들이 붙인 포스트잇 메시지와 함께 춤과 노래를 연습할 수 있는 공간,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작업실, 기대어 누울 수 있는 소파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 문구들은 마치 말을 걸듯 친근했고, 이 모든 요소 덕분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도 안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낯선 어린이와도 금방 친구가 되던 유년기의 놀이터를 떠올리게 했다. 단지 놀이의 재료가 흙보다 훨씬 다양할 뿐이었다.

티티섬을 운영하는 ‘도서문화재단 씨앗’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도서관 모델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 재단이다. 청소년 중심의 공공 도서관 ‘라이브러리 티티섬’, 어린이와 청소년이 창작 작업을 할 수 있는 도서관 ‘제3의 시간’ 등 실험적인 도서관을 건립 및 운영하며 새로운 도서관의 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공공도서관과 협업해 도서관 내부에 청소년을 위한 공간 등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경기도 성남시 청소년 중심 도서관 ‘라이브러리 티티섬’의 모습. /라이브러리 티티섬 누리집 갈무리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포용성’이었다. 문기원 매니저는 “도서관의 포용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미션잇의 김병수 대표의 강의를 듣고 만났는데, 당시 책장에 꽂혀있는 MSV 시리즈를 보고 협업을 제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MSV는 ‘사회적 가치를 만나다(Meet Social Value)’의 약자로, 소외계층의 사용자 경험을 연구하는 디자인 콘텐츠 기업 미션잇이 발간하는 도서다. 2021년 창간호 이동(장애인의 이동과 공공 디자인)을 시작으로, 직업(업무 환경), 놀이(장애 아동의 놀이와 공간 디자인) 등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뤄왔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된 협업은 최근 출간된 MSV 시리즈 6호 ‘도서관’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이번 책은 도서문화재단 씨앗이 공동기획과 제작지원을 맡아 협력 출판 형태로 발간됐다. 이번 호에는 전 세계 포용적 도서관의 사례와 함께, 도서관 담당자와 전문가, 장애인 당사자의 인터뷰가 담겼다. 또한 물리적 접근성부터 심리적 장벽을 낮출 방법까지 포용적 도서관의 12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 도서관을 ‘포용의 공간’으로 상상하다

“사람들이 묻곤 해요. 왜 하필 도서관인가요?”

문기원 매니저는 2019년 청소년 공공도서관 프로젝트를 맡으며 이 질문에 수없이 답해야 했다. “도서관은 지역 곳곳에 이미 존재하는 오프라인 기반의 공공 공간이에요. 특정한 목적이 없어도 누구나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죠. 그런 공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는 한 가지 더 덧붙였다. “포용적 도서관은 단지 공간만이 아닙니다. 장애 당사자, 청소년, 전문가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요.”

문기원 도서문화재단 씨앗 매니저가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6호 ‘도서관’을 들고 있다. /성남=김용재 영상C미디어 기자

그의 말에 김병수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처음 생각한 도서관은 공부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됐다. “특수교사 한 분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아무 조건 없이 갈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런 공간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 도서관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포용적 도서관은 단순히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공간이 아니다. 모든 사용자가 심리적·물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두 사람은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도서관 관계자, 장애 당사자, 특수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통해 도서관이 품어야 할 12가지 포용 요소를 정리했다.

◇ 누구나의 공간, 세계 속 도서관의 변화

이야기는 자연스레 책 속 사례로 이어졌다. 김 대표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일본 이시카와 현립 도서관이었다. 그곳은 “가이드라인 숫자를 맹신하지 말라”는 철학으로 설계된 도서관이다.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데 가이드라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일본 이시카와 현립 도서관 설계 당시 여러 테스트를 거치는 모습. /미션잇 누리집 갈무리

2022년 7월 개관한 이시카와 현립 도서관은 설계 초기부터 장애 당사자와 직접 협력하며 최적의 구성을 찾아갔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와 장애인용 화장실, 영유아 동반자를 위한 시설, 만질 수 있는 촉지 지도와 유도 블록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됐다. 도서관 측은 실제 이용자와 함께 경사로 모형을 만들고 여러 차례 테스트를 진행했다. 책장의 높이나 사인판의 가독성까지 세심하게 조정하며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특히 출입구 근처에는 음성 안내가 제공되며, 내부에서는 도서관 직원이 직접 관내를 안내하는 서비스도 제공된다. 장애인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마련된 이 공간은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동시에 낮춘 사례로 손꼽힌다.

문기원 매니저는 모든 사례가 인상 깊었다며 고민 끝에 크로아티아의 프란 갈로비치 공공도서관을 꼽았다. 그는 이 도서관에서 포용적 도서관을 향한 ‘실패해도 괜찮은 용기’를 발견했다. “북유럽처럼 완벽한 모범사례만 보면, 국내에서는 ‘우린 불가능할 거야’라고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크로아티아는 우리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더라고요. 부족한 점도 솔직히 공유하며 접근성을 개선하려고 하는 모습이 많은 용기를 줬습니다.”

크로아티아 코프리브니차에 위치한 프란 갈로비치 공공도서관은 2022년 시각장애인 도서관과 협력해 핀란드 셀리아 도서관의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자국어로 번역, 인쇄 및 전자 버전으로 출판했다. 접근성에 대한 사서들의 인식을 높이고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였다.

도서관의 전 관장은 완벽과는 거리가 먼 현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접근성에 대한 교육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운영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공공도서관과 시각장애인 도서관 간 협력을 강화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지난 10월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6호 ‘도서관’을 출간한 김병수 미션잇 대표의 모습. /성남=김용재 영상C미디어 기자

◇ 모두가 머무를 수 있는 도서관의 12가지 요소

책은 포용적 도서관을 위한 12가지 요소를 물리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로 나누어 제시한다. 물리적 요소는 ▲소통 방식에 적합한 회원 가입 ▲문턱 없는 출입문 ▲사용자 친화적인 길 찾기 ▲대체 입력 장치가 마련된 키오스크 ▲휠체어 이용자도 꺼낼 수 있는 높낮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다. 심리적 요소는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환대 ▲모두를 위한 도서관 선언 ▲책 읽는 방법과 공간 이용 방식의 다양성 인정 ▲직원의 다양성 ▲다양한 의사소통 방법 ▲누구나 참여 가능한 프로그램 등이다.

김병수 대표가 가장 시급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꼽은 것은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환대’였다. 그는 핀란드 오디 중앙 도서관의 사례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디 중앙 도서관의 벽에는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 도서관이며,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두를 환영하고 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어요. 그 메시지 하나가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김 대표는 환대의 작은 요소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국내 사례에서도 발견했다. 한 도서관을 돌아보던 중,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지도가 외벽에 종이 한 장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외벽에 종이로 허술하게 붙어있는 지도와, 정성이 담긴 안내판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물리적 요소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건 비용이 들겠지만, 이런 작은 메시지는 적은 예산으로도 실현할 수 있어요.”

문기원 매니저는 ‘책 읽는 방법과 공간 이용 방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가장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서관은 고요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규범이 일부 이용자들에게는 경직감을 준다고 말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신체적 특성상 소음을 피할 수 없는 이용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포용의 한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더 조용함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거나, 음악을 재생해 어느 정도의 소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어요. 공간을 바꾸는 데 큰 비용을 들지 않고도,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문 매니저는 포용적 도서관을 위한 첫걸음으로 도서관 관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모두를 위한 도서관 선언’이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의 분위기는 이용자와 운영자가 함께 만들어 갑니다. 관장이 직접 포용적 도서관을 위한 선언을 한다면, 그 자체로 변화를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문기원 도서문화재단 씨앗 매니저(왼쪽)와 김병수 미션잇 대표의 모습. /성남=김용재 영상C미디어 기자

◇ 포용적 도서관의 본질에서 배우는 것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포용성의 범주를 확장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과제라 입을 모았다.

김 대표는 MSV 시리즈를 발간하며 느낀 점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포용성이라는 주제는 정말 광범위해요.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새롭게 조명해야 할 영역이 많습니다.”

그는 포용적 디자인이라는 주제가 자칫 진부하게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려 애쓰고 있다.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각 사례와 사람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요소를 끄집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이렇게 MSV를 꾸준히 발간하며 소외된 영역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문 매니저도 포용적 도서관을 향한 꾸준한 고민과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포용적 도서관을 완성하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라고 했다. “공간, 콘텐츠, 이용자, 운영자, 시대까지 끊임없이 변하잖아요. 완벽한 포용적 도서관은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포용적인 도서관을 만들어 가려는 목표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문 매니저는 포용적 도서관의 비전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계없이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발견할 수 있는 공간. 그는 이 비전을 도서관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장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냥 같이 사는 거다.” 그는 느티나무 도서관의 박영숙 관장이 남긴 이 한마디에 포용적 도서관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포용의 가치가, 우리 사회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다.

성남=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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