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여성의 힘으로 큰 화장품 기업…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다

아모레퍼시픽재단 50주년

50년간 1509명 지원
인문학 연구에 초점

선대회장 뜻 따라
여성 문화복지 등 연구

앞으로 문화사업에 집중
한국 위상 높일 것

2019년 ‘아모레퍼시픽 포럼’에서는 아시아인의 삶의 질, 미 의식에 대해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이 모여 소통했다. /아모레퍼시픽재단
2019년 ‘아모레퍼시픽 포럼’ 현장. 아시아인의 삶의 질, 미 의식에 대해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이 모여 소통했다. /아모레퍼시픽재단

1924년 황해북도 개성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 옆에서 장사를 배웠다. 어머니는 도매상에서 등잔 기름, 머릿기름 등을 떼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어머니는 여성들이 머리 손질할 때 쓰는 동백기름을 직접 만들어 매대에 내놨다. 제품은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소년은 품질과 신용을 강조하는 어머니 곁에서 이른바 ‘기업가 정신’을 배웠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소년은 화장품 회사를 설립했다. 스물한 살 되던 해다.

아모레퍼시픽그룹 창업주인 고(故) 서성환(1924~2003) 선대회장의 이야기다. 서 전 회장은 생전에 “회사의 모태는 어머니이며, 여성들이 회사를 키웠다”고 자주 말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여성용 화장품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 여성 일자리와 복지 등을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1973년에는 아모레퍼시픽재단(이하 재단)을 설립하고 여성 인재 육성과 학술 연구를 지원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재단이 지금껏 지원한 연구자와 장학금 수령자는 1509명에 달한다.

여성의 힘으로 큰 화장품 기업...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다

여성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재단의 관심은 줄곧 ‘인문학’에 있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뤄지던 1970년대에는 이공계에 대한 지원도 병행했지만, 1995년 재단 정관에서 ‘과학기술 개발을 위한 교육·문화사업을 편다’는 문장을 삭제하면서 사학과 철학, 사회과학 등에 대한 지원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김태우 아모레퍼시픽재단 사무국장은 “인문학은 중요한 연구 분야지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고유명사처럼 사용될 정도로 오랜 기간 홀대받았다”며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정신적 국력을 강화할 방법을 찾는다’는 재단 설립 취지에 맞게 인문학자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 연구자만 지원한 건 아니다. 1995년에는 전국의 여자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논문 대회 ‘컬춰렛(Culturette) 선발 공모전’을 개최했다. 컬춰렛은 ‘여성 문화 활동가’를 뜻하는 말로, 21세기 새로운 여성 문화를 창조하고 앞서가는 여성상을 상징했다. 공모전은 여대생들이 여성의 역사와 문화, 사회 진출 등에 대해 탐구하면서 진취성을 높이게 한다는 취지로 열렸다. 당시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49.8%로 남성(52.8%)과 비슷했지만,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는 컸다. 대졸 남성의 경우 93.4%에 달했지만, 대졸 여성은 60%로 낮았다.

2004년까지 열린 공모전에는 여성 리더의 조건, 여성의 가정 내 역할, 여성 사회 진출을 위해 필요한 정책, 미디어에 비친 여성의 이미지 등 여성과 관련된 광범위한 주제의 논문이 나왔다. 여대생 논문 중엔 통통 튀는 내용이 많았다. 3회 대회에 참가한 조수정·조민정씨는 1990년대 TV 광고를 분석해 우수상을 받았다. 연구진은 여성을 요리 잘하는 현모양처로 묘사한 조미료 광고, 남성의 프러포즈를 받고 기뻐하는 여성을 그린 가구 회사 광고 등이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공모전 주최사인 태평양(아모레퍼시픽의 옛 사명) 광고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다. 논문은 “화장품 광고는 제품 특성상 ‘여성은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존재’라는 성 고정관념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태평양의 ‘라네즈’ 광고는 음악이 나오자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여성 모습을 담았다”며 “도전적이고 당당한 현대 여성상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보였다”고 했다. 10년 동안 총 110편의 논문이 수상했다. 1996년도 컬춰렛에서 수상한 학생이 12년 후 전문 연구자로 성장해 재단에서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는 선순환이 일어나기도 했다.

2018년 열린 ‘아시아의 美 국제학술대회’. 독일·미국·싱가포르 등 6국에서 온 연사 23명이 아시아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발표했다. /아모레퍼시픽재단
2018년에는 ‘아시아의 美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독일·미국 등 6국에서 온 23명의 연사가 아시아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발표했다. /아모레퍼시픽재단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재단은 2000년대에 들어 지원 주제를 문화 전반으로 넓혔다. 2007년에 시작한 학술연구비 지원 사업 ‘여성과 문화’, 2012년 런칭한 ‘아시아의 美’ 공모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차(茶) 문화 연구, 개성상인 연구 등으로 지원 주제를 다각화했다.

‘여성과 문화’ 사업에서는 조선 시대 여성의 화장법과 의상, 태교 방식, 음악 취향 등 여성 문화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는 역사 연구들이 진행됐다. 화장품 기업 재단이지만, 외모지상주의에 비판을 가하는 연구도 다수 수행됐다. 예를 들면 2007년 발표된 ‘성인여성의 생애주기별 외모만족도, 자아존중감, 우울, 스트레스 및 삶의 질에 관한 연구’에서는 “여성은 자신을 대중 매체 속 이상적인 여성 외모와 비교하면서 자신 몸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면서 “건전한 외모 관리 문화를 조성해 겉모습에 투자하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시아의 美’는 아름다움에 대한 서구 중심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아시아 지역만의 미적 개념과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사업이다. 아시아 지역의 건축, 패션, 미술, 향기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12년부터는 학술 연구 결과가 대중에게도 알려질 수 있도록 대중서를 발간하고, 교양 강연도 개최한다. 지금까지 ‘여성과 문화’는 10권, ‘아시아의 美’는 22권의 도서로 출간됐다. 이밖에도 다양한 포럼을 열면서 대중과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재단 지원은 주로 젊고 유망한 신진 연구자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성별은 가리지 않는다. 지원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장원 인문학자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인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 5년 이내인 개인 연구자에게 매월 400만원을 최대 4년간 지원한다. 김태우 사무국장은 “이제 막 박사 학위를 딴 연구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시간강사 등으로 일하느라 연구에 몰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순수 학문 분야의 안정적인 학술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이들에 대한 지원 규모를 대폭 늘린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재단은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는 만큼, 문화예술 지원을 더욱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재단 관계자는 “지난 50년 동안 재단은 여성, 인문학, 신진 연구자 등 연구 기반이 취약한 곳을 찾아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지원을 펼쳐왔다”며 “앞으로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문화 영역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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