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선자에게도 커피가 필요하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가 화제다. 일제강점기 영민함과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던 젊은 여인 선자는 갑작스런 임신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무력으로 조국을 지배하는 제국의 심장에 던져지는 것도 어려운데, 남편은 병약하고 일자리 없는 가족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 그러나 선자는 온갖 역경을 이겨, 가정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거나 급작스런 환경변화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업루티드 피플(Uprooted people)’이라고 한다. 뿌리가 뽑혀나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뿌리를 잘 내려도 흔들리며 갈등하는 것이 삶의 본질인데, 예상치 않았던 사건은 우리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곤 한다. 사람만을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따라 삶의 총체를 구성한 생활양식과 지식과 기술 등도 함께 이동한다.

업루티드 피플을 따라, 세계 각지를 이동하며 그들의 삶을 달래준 대표적인 상품이 커피다. 별빛을 따라 육로의 무역 길에 나선 아라비아 상인들과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목숨을 건 대항해의 끝에서 아프리카 노예의 손을 빌려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산업혁명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끼니가 되어 주고, 프랑스 혁명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전쟁만큼 커피의 확산을 촉진한 단일 사건은 없다. 커피는 미국 남북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할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필수적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 봉쇄령을 내려 남군의 커피 보급을 끊어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했다.

남북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군인들과 함께 커피의 아메리카 대륙 여행은 시작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원두 대신 인스턴트 커피가 병영에 투입되며 세계 각지의 전선에 소개됐고, 2차 대전에는 인스턴트 커피가 미군의 전투식량 품목으로 지정돼 한국에 따라오기도 했다.

이때까지 커피는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전쟁 승리의 필수품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커피는 그 역할을 달리한다. 베트남전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으로, TV를 통해 보여지는 제초제 투하와 민간인 학살은 전 세계 시민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전쟁에서 생존해 돌아온 미국 군인들은 GI 커피하우스를 만들고, 이곳에서 참전했던 동료를 만나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전쟁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1970년대 들어 GI 커피하우스는 참전 군인들을 위한 법률상담과 반전시위 정보를 제공하며, 미 전역에 20여개 매장을 확대했다. 군 당국의 집요한 방해로 큰 성장은 어려웠지만, GI 커피하우스는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며 반전운동과 전쟁에 희생당한 군인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진실을 마주하며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어줄 때, 커피는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다.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내전으로 상처받은 르완다에서도 커피농업이 불러온 풍요와 발전은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침내 그들을 일어서게 한 동력이었다.

지난 4월 7일은 1994년 르완다 내전이 발발했던 날이다. 약 100일 동안 100만 명이 죽고 죽이는 대학살로 초토화된 땅에 국제개발기구들은 ‘커피와 농업을 통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르완다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먹고 살거리를 마련하며, 동시에 수십년 간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평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커피는 긴 여정의 동반자였다.

필요한 전쟁은 없다. 전쟁에 명분이 있을 수도 없다. 베트남에서, 르완다에서 위정자들의 전쟁은 깊은 상처만 남겼다. 그나마 커피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를 도왔을 뿐. 우크라이나라고 다르지 않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후, 우크라이나에 많은 커피하우스가 들어선 것이 그렇다. 파친코를 보면 나이 든 선자가 커피를 찾는다. 그러나 그 많은 한과 설움은 커피로도 풀리지 않는다. 전쟁은 지금 멈춰야 한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