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앞선 자 뒤서고, 뒤선 자 앞선다

지난 10여 년, 공정무역 커피 비즈니스 덕에 나름 개성 있는 커피 생산지를 경험해 왔다. 스페셜티 커피처럼 맛있는 커피만을 찾아 여기저기 다닌 것이 아니다 보니, 한 산지에 긴 시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렌즈로 그 사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 렌즈의 이름은 젠더, 인류학, 경제학, 비즈니스, 사회혁신 등 다양하다.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매혹했던 관점은 ‘다이내믹스(dynamics·사물 간의 변화를 주는 힘의 작용)’다. 어떻게 변화가 찾아올까, 무엇이 변화를 견인하는가. 최근 흥미 있게 본 생산지는 코스타리카 커피 섹터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영세중립국으로 선언한 이 나라에는 유엔 부설 대학원 대학인 유엔평화대학이 있다. 또 생태적으로 잘 보전된 지역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일찍이 재생에너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공급 가능한 에너지의 90%가 신재생에너지라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 ‘탄소중립 커피’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기후위기의 시대에 앞선 자가 걸어온 길이 궁금하다. 코스타리카는 중미의 인구 500만 국가로 식민지 시대부터 커피, 바나나 등의 단일 작물 경작과 수출을 주된 경제활동으로 영위했다. 토착 원주민의 숫자가 작아 스페인 본국에는 무의미했던 땅이었지만, 원주민과 영토분쟁 없이 커피 재배 면적을 확대할 수 있었기에 인접 주변국보다 50년 이상 빠르게 커피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 내 커피재배 확산 과정도 다양하다. 초창기 작은 길을 놓고 비즈니스를 시작한 따라주 지역은 소농 기반의 소규모 경작과 가공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후 대서양 철도와 판아메리칸 하이웨이로 연결된 뚜리알바, 뻬레스 셀레동 지역은 대규모 경작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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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한국 쌀에도 공정무역이 필요한 이유

유례없이 큰 태풍 ‘힌남노’가 추석 직전 몰아닥쳤다. 여름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진 큰비, 연초부터 줄줄이 인상된 금리와 환율 등 추석 차례상 물가 걱정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각종 식품 제조 가공업체들은 추석 대목까지만 버티고, 이후 가격 인상을 예고한다. 사실 장바구니 한번 들어본 사람이라면, 추석 차례상 아니라도 익히 체감한 일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밀값 상승의 불안감이 이어지고, 작년부터 이어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은 우리 먹거리 시장을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위기를 체감할 상황은 닥치지 않았다. 한국 정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식량위기를 느낄 정도가 되면, 개발도상국에선 이미 식량 위기로 폭동이 나도 여러 번 났어야 한다. 즉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의 백성들에게 식량 위기는 늘 먼저 닥친다. 다행일까. 이렇게 전 세계가 기후위기에 따른 식량으로 불안한 가운데 한국의 주곡인 쌀 자급률은 그나마 선방하고 있다. 연속 풍년으로 너무 선방한 나머지, 물가는 오르는데 쌀값만 폭락하고 있다. 햅쌀 본격 출하 시점을 앞둔 지난 8월 농민들은 쌀값 안정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농민들은 “정부가 시장에 있는 쌀을 사들이는 ‘시장격리’ 조치를 세 차례 발동했지만, 쌀값은 작년 대비 23.6% 폭락했다”며 필수 농기자재에 대한 지원과 햅쌀이 풀리기 전 신속한 시장격리, 농업 생산비 보전 등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용산 방면으로 향하며, 화물차에 실린 볍씨를 도로에 뿌렸다. 판로가 없어 헐값으로 커피를 팔아야 하는 개발도상국가 농민들은 항의할 관계 기관이 없어 스스로 커피나무를 갈아엎었다 하는데, 우리 농민들은 항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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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해방,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8월 23일은 ‘세계 노예무역 및 철폐 기억의 날’이다. 역사 속에서 인류가 부의 축적을 이루는 가운데 노예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로마 콜로세움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끈 검투사들도 노예였으며, 일본의 도예 문화를 꽃피운 조선의 장인들도 노예였다. 남미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세계 곳곳에 공급한 것도 노예다. 이 중에서도 16세기부터 시작된 삼각무역에 동원된 흑인 노예들은 그 이전의 노예들과 매우 다르다. 검투사는 승리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장인은 그 재주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이 고안한 노예무역은 ‘흑인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개념화했다. 그래야만 노예선에 높이 30cm로 다섯 단을 쌓아 사람을 짐짝처럼 차곡차곡 눕혀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상태로 운반되는 노예가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면, 바다에 밀어 넣어 수장을 시키고 보험금을 받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 된다. 영화 ‘벨(BELLE)’은 1781년 9월 자메이카를 떠난 노예선 ‘종(ZONG)’호에서 3일간 133명의 병든 노예를 바다에 수장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보험금을 노린 사건이다. 종호는 영국에 도착해 보험금을 청구하나, 보험사는 거절했고 긴 재판이 이어졌다. 결과는 패소했고 이 일은 영국사회에 노예무역의 잔혹성이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초기 노예무역 반대론자들의 캠페인은 어쩌면 요즘 공정무역 캠페이너들의 활동과 비슷하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식민지에서 생산한 설탕 불매운동(boycott)을 벌이면서 ‘노예의 피로 만든 달콤함을 거부한다’며 인도산 설탕을 대안(buycott)으로 소비하기도 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주장이 담긴 신문이 돌고, 카페에서는 그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다. 그 카페의 커피는 공정무역이 아니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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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드라마 속 우영우의 충고 “핵심을 봐야 해요”

“핵심을 봐야 해요.” 최근 인기를 끄는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충고다.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지만,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가진 변호사다. 그녀는 지금 일어난 현상 너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사건의 핵심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어떤 마음과 의도를 갖고 그 일을 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지난 5월 31일은 ‘바다의 날’이었다. 그즈음, 바다의 미래에 대한 매우 중요한 무역협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협정은 강대국과 개도국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21년을 끌고 왔다. 어떻게 바다를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우리의 미래를 지킬 것인지 그 ‘핵심’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역협정을 다루는 사람 중에 우영우 같은 변호사가 없기 때문일까. 무역협정이란 국가 간 산업의 개방 또는 보호를 위해 수출입 관세와 시장 점유율 제한 등의 무역장벽을 제거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또한 수출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협상국가 내의 보조금도 규제한다. 보조금을 받은 생산농가는 국제시장에 낮은 가격으로 팔 수 있고, 이는 무역질서 교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년째 타결하지 못한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협정 주제는 바로 ‘수산업 분야에 대한 보조금’이다. 이런 협정은 매우 전문적이고 실생활에 대한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체감하기 어려워 시민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무역협정과 관련 우리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몇 장면이 있는데, 2008년 ‘광우병 위험물질이 포함된 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그렇다. 당시 협정에서 문제가 됐던 부분은 광우병을 일으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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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코카콜라엔 있고, 스타벅스엔 없는 것

빈용기 재사용 생산자가 부담하는 취급수수료.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이 제도 덕에 동네마트나 편의점에서 팔린 음료수 공병의 90% 이상이 생산 공장으로 되돌아온다. 공병을 세척, 소독, 재활용하여 자원 낭비를 막는다. 국내에서 소주, 맥주, 청량음료 제조사들은 한 병당 약 30원가량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는 이 돈을 재원으로 소비자가 상점에 빈 병을 반환하도록 촉진하고, 도소매 상점들은 수거센터의 역할을 하도록 계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음료회사 13곳이 연간 납부하는 취급수수료 규모는 2800억원 정도다. 제도 시행 초에는 혼란도 있었지만, 2016년부터는 병 음료 출고량 대비 회수비율이 95.2%나 된다고 하니 작은 수수료의 위력이 엄청나다. 그런데 어지간한 병 음료보다 더 비싼 값으로 판매되는 커피가 담긴 일회용 컵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2002년 자발적 협약에 근거해 처음 시행되었다가 2008년 폐지, 그리고 2018년 경기수도권 쓰레기 대란으로 다시 한번 도입이 논의되어, 마침내 오는 6월 ‘일회용 컵 보증금제도’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당국은 지난 2년간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자원재활용법을 개정하여 추진의 근거를 마련했다. IT 강국답게 온라인으로 원스톱 관리가 가능한 앱을 개발하고, 지난 제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반납처를 구매처에 상관없이 반납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거리에 무단으로 투기 되던 일회용 컵이 사라지고 소각 시 발생하는 온실가스 60% 이상을 줄일 수 있다. 하와이에서는 이 제도를 도입한 첫해에만 해안가에 무단투기 되던 일회용 컵의 50%가 회수되었다. 한국은 보증금제도의 점진적 안착을 위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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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선자에게도 커피가 필요하다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가 화제다. 일제강점기 영민함과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던 젊은 여인 선자는 갑작스런 임신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무력으로 조국을 지배하는 제국의 심장에 던져지는 것도 어려운데, 남편은 병약하고 일자리 없는 가족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 그러나 선자는 온갖 역경을 이겨, 가정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거나 급작스런 환경변화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업루티드 피플(Uprooted people)’이라고 한다. 뿌리가 뽑혀나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뿌리를 잘 내려도 흔들리며 갈등하는 것이 삶의 본질인데, 예상치 않았던 사건은 우리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곤 한다. 사람만을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따라 삶의 총체를 구성한 생활양식과 지식과 기술 등도 함께 이동한다. 업루티드 피플을 따라, 세계 각지를 이동하며 그들의 삶을 달래준 대표적인 상품이 커피다. 별빛을 따라 육로의 무역 길에 나선 아라비아 상인들과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목숨을 건 대항해의 끝에서 아프리카 노예의 손을 빌려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산업혁명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끼니가 되어 주고, 프랑스 혁명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전쟁만큼 커피의 확산을 촉진한 단일 사건은 없다. 커피는 미국 남북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할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필수적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 봉쇄령을 내려 남군의 커피 보급을 끊어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했다. 남북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군인들과 함께 커피의 아메리카 대륙 여행은 시작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원두 대신 인스턴트 커피가 병영에 투입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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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의 커피 한 잔] 여성 농부들, 커피 산업의 주인이 되다

2013년 네팔. 커피 수확이 한창인 3월 초. 깊은 산 속 커피 농장 새벽 한기는 뼈가 시릴 정도다. ‘커피를 따러 가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침대 속 따뜻함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다. 커피를 사러 농가를 방문한 나의 게으름 저편으로 산중 그녀들의 아침은 분주하다. 마당에 건 솥단지에선 집안의 큰일을 해내는 검둥소에게 먹일 여물이 끓고 부엌에서는 장작이 타는 소리, 달그락 그릇 소리가 요란하다. 일단 커피 농장으로 나가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아침은 든든히 먹고 농장에서 먹을 도시락도 싸야 한다. 학교에 가는 자녀들 등교 준비를 돕고, 젖먹이를 들쳐 업고 저녁에 쓸 물도 미리미리 길어다 둬야 한다. 텃밭의 야채를 거두어 집안에 챙겨두면 비로소 그녀들은 커피농장으로 향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부자가 된다면 내가 네팔에서, 르완다에서, 페루에서 만난 커피 농가의 여성들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15년 페루. 여성들의 노동은 장소와 시간을 바꿔 계속된다. 커피나무 가지치기, 가뭄에 견딜 수 있도록 흙 덮어주기, 묘목을 심어 미래의 수확을 준비하기, 적정한 비료 주기, 잡초 뽑기.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면 드디어 수확의 기쁨이 찾아온다. 빨간 체리를 골라 따고 세척장에 이동할 수 있게 포장하는 일까지, 커피 농장의 일은 끝이 없다. 국제여성커피연맹(IWCA)의 통계에 따르면, 커피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100이라면, 이 중 75가 여성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75의 일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부분 가족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부가가치가 낮은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커피와 민주주의

“당신은 왜 커피를 마시나요?” 커피업에 몸담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질문은 늘 어렵다. 마치, 물은 왜 마시나요? 밥은 왜 먹나요? 이런 질문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커피는 각성제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한두 모금이라도 마셔야 무엇인가 시작하는 느낌을 받는다. 진정한 하루는 이때 출발하지 싶다. 집에서 휴식하는 주말 아침에도 눈뜨면 일단 커피를 내린다. 그 따듯한 기운에 다시 이부자리로 파고들어 간다 하더라도 커피는 출발이다. 먹을 거 다 먹고도, 당 떨어지는 느낌이 심하게 들 때는 커피믹스가 제격이다. 커피믹스 한잔의 칼로리는 40~50㎉다. 밥 한 그릇이 300㎉인 데 비하면 식사를 대신하기는 어렵지만, 달콤한 그 맛은 식간 급한 불 끄기엔 제격이다. 커피는 리프레시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커피는 빠질 수 없다. 어려운 미팅일수록 약간의 긴장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주는 음료는 아마도 커피뿐일 것이다. 정신을 맑게 하면서도 차 한잔을 두고 커피 고르는 취향부터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커피는 중재자이기도 하다. 왜 커피를 마시냐는 질문이 무색하게도, 커피는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커피는 수도승들이 밤새 기도하고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 처음 마셨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 마시면 아랫사람도 마시고 싶고, 그 옆 사람도 마셔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계급과 돈으로 막혀 있어도 문화란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대항해 시대의 범선들이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무역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497년 바스쿠다가마에 이어 콜럼버스도 항로 개척에 성공한다. 더 적극적인 공급을 위해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오염자 부담의 원칙

글래스고 기후회의가 지난달 13일 막을 내렸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 이후, 6년 만에 열린 당사국총회가 협상 마감 시간을 하루 남기고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약속은 거창하지만, 산출물은 미흡하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평가대로 단계적 탈석탄이 아닌 석탄 감축에 머무른 합의와 기온 상승 폭 1.5도를 훌쩍 넘긴 2.4도를 허용해버린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은 현재의 고통을 미래에 전가하며 우리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었다. 아쉬운 가운데 몇 가지 진전도 눈에 띄는 진전도 있었다. 6년이란 시간을 끌어온 파리협약 6조의 ‘세부이행 규칙’이 완결되면서 국제 탄소 시장이 활성화될 길이 열렸다. 기껏 탄소를 배출해 놓고, 탄소 교환권을 매입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속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기업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더불어 기후위기에 취약한 개발도상국과 섬나라 정상들이 ‘원조가 아닌 보상’을 시행하라며 ‘오염자 부담 원칙’을 들고나온 것도 눈에 띈다. 기후위기의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권리를 침해당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인식의 출발이다. 그간 기후위기로 피해를 본 가난한 나라들은 탄소 배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유국들에게 손실과 피해에 따른 보상금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부유국들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보상이 아닌 국제협력’으로 선을 긋고 있다. 부자로서 의무는 하겠지만, 잘못해서 비용을 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머니에서 빼서 쓰나 저 주머니에서 빼서 쓰나, 부유국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같은데, 왜 지원금으로 국한하는 것일까. 영국 개발협력단체 옥스팜(OXFAM)은 2017~2018년 공공 기후적응 지원금의 80%가 차관으로 지원됐다고 집계했다. 차관은 빚이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일하는 사람들의 커피

90년대 초반, 대학생 농촌활동을 위해 충남의 한 지역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농민과 학생이 연대한다’라는 모호한 말보다는 넓은 밭에 가지런하게 심겨진 푸른 먹거리들을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밭을 보면 그 댁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듯 반듯하게 정리된 들판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한번은 농민회 아저씨가 학생들 고생한다며 간식을 들자고 청했다. 집에 계신 아주머니께 전화를 한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읍내 다방 마담이 커피 보온병과 커피잔을 가지고 나타났다. 뾰족한 힐을 신고 논두렁 길을 걸어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병에서 커피 프림 등을 한 숟갈 뜨면서 아저씨, 아주머니와도 친하게 이야기했다. 여러 잔의 커피를 사람 수에 딱 맞게 만들더니 “아저씨, 나 지금 바빠서, 저기 배달 좀 갈게. 학생들 좀 있다가 봐” 한다. 대학생들이 이렇게 시골에 나타나면 귀한 손님 대접한다고 아저씨들은 안 하던 일을 벌이신다. “맛있지유?” 아저씨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물으시는데, 여자 종업원이 따라 주는 커피를 어린 여자인 내가 손님이 되어 먹는 것이 편할 리 없다. 1987년 커피 수입자유화 조치로 원두커피 수입이 본격화되면서 인스턴트 커피는 여러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커피 매장은 ‘카페’와 ‘다방’으로 나뉘어 각각 원두와 인스턴트 커피를 팔았다. 다방들은 고급 이미지의 원두커피에 상대할 힘을 얻기 위해 ‘음악다방’이나 ‘티켓다방’으로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방의 등장은 음악다방의 운명도 위태롭게 했다. 티켓다방은 점점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시골에서도 이런 현상은 있었는데, 서로 다 아는 지역사회에서 티켓을 ‘세게’ 팔 수는 없고, 고작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쓰레기 만드는 기업

‘예쁜 쓰레기’. 형용 모순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월 진행된 ‘화장품 어택(attack)’ 캠페인은 모순된 단어의 조합인 ‘예쁜 쓰레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었다. 환경운동단체 녹색연합은 화장품 용기는 예쁘기만 할 뿐 거의 재활용이 되지 않는 쓰레기이며, 정부는 ‘포장재 재질·구조 등급표시 및 분리배출 표시에 관한 고시’ 개정안에서 화장품 회사만 제외해 특혜를 주고 있다고 폭로했다. 화장품 회사는 소비자의 주목을 끌기 위해 다양한 재질의 장식, 부속품을 화장품 용기에 붙인다. 또 단가가 낮고 휴대성이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대부분 소용량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런 용기는 재질과 크기의 문제로 대부분 재활용이 불가하다. 사실상 90% 이상의 화장품 용기에 ‘재활용 어려움’이라는 라벨이 붙어야 하는데, 화장품 업계는 수출 진작과 브랜드 이미지 하락 등을 이유로 들며 이 행정예고를 번번이 피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의 어이없음은 충격과 허탈의 롤러코스트를 거쳐, 분노로 조직됐다. 2주간 8000개의 ‘예쁜 쓰레기’를 모은 시민들은 화장품 회사의 사옥 앞에서 화장품 용기 쓰레기를 펼쳐 놓고 요구했다. “쓰레기를 만든 사람이 책임져라!” 한국사회에 기후시민의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캠페인만큼 풀뿌리가 스스로 움직인 적이 있었을까. 그간 기후변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워만 하던 시민들이, 구체적인 범인으로 화장품 회사를 지목하고 그들을 법과 제도로 규제하기로 한 것이다. 시민들은 SNS를 통해 캠페인을 확산하고, 자신뿐 아니라 지인들을 독촉해 빈 화장품 용기를 모았다. 전국의 제로웨이스트 가게, 로컬푸드 상점, 공정무역 카페 등이 수거장소로 등록하면서 일이 커졌다. 쓰레기가 쌓인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평온한 바다를 위한 절반의 책임

수산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한 편이 화제다. 지난 4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씨스피라시’. 바다(Sea)와 음모(Conspiracy)의 합성어로, 해양수산업의 이면을 떠받치고 있는 물고기 남획 및 학살, 해양 쓰레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산업 어구 등을 다룬 이야기다. 다큐의 출발은 해변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주우며 바다를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플라스틱 빨대가 코 끝에 박혀 고통받는 바다거북이와 그물에 몸이 감겨 발버둥치는 해달과 같은 약한 것들에게 연민할 줄 안다. 그리고 자원봉사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형마트에 들러 살찐 다랑어와 잘 손질된 새우를 사 먹는다. 이것이 조금 전 실천한 바다 보호 활동을 거스르는 일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영양분의 원천인 어패류를 저렴한 가격에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기 전, 인류는 바다 자원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고, 이는 잦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와 전 유럽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염장 청어도 1358년 변방의 어부 빌렘 벤켈소어가 생선의 내장을 단번에 제거할 수 있는 손칼을 발명한 덕분이었다. 이 손칼로, 어부들은 시간당 2000 마리의 청어를 손질할 수 있었고, 바로 염장한 청어는 1년동안 상하지 않고 밥상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보존에 자신감을 갖게 된 어부들은 더 멀리 나가 조업을 했고, 늘어난 포획량은 유럽내 상거래를 촉진시켰다. 청어 무역이 발달하면서, 당연히 항해도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업을 발달시켰고, 또한 해운업과 물류산업을, 그리고 무역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7세기 삼각무역의 강자로 떠오를 발판을 마련했다. 모든 기술의 진보에는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빛과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