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월)

[최재호의 소셜 임팩트] 새로운 여행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

영리기업과 비영리단체는 그 경계가 명확하고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 사회 통념이다. 영리기업은 수익 창출과 주주이익이 우선이고, 비영리단체는 사회적 가치 창출과 공공의 이익이 우선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영리기업에서 사회공헌을 담당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영리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거나 비영리단체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어떤 면에서는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시대적으로도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기업을 통해 부를 창출한 비즈니스 리더 중에서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사회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비콥을 통해 사회혁신 기업을 발굴하는 미국의 비영리기관 ‘B Lab’을 이끄는 바트 홀라한은 스포츠 의류회사인 앤드윈의 회장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게이츠는 2000년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기후변화 등 전 세계의 사회문제에 대한 이슈를 주도하고 있다. 파타고니아의 이본 쉬나드 회장은 전설적인 등반가, 서퍼, 환경운동가이다.

파타고니아는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라는 사명 선언문을 바탕으로 집요하게 환경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기업인지 환경단체인지 헷갈릴 정도다. 또한, 비영리 영역에서도 대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스페인의 몬드라곤은 가전, 건설, 첨단산업을 바탕으로 250여개 사업체로 구성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직원들의 해고 없이 극복하였으며, 오히려 1만 5000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하며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주주가치 극대화와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듯이, 사회적 가치와 나눔을 추구하는 비영리의 마인드는 지속가능한 포용적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 이제는 영리기업이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기후변화, 고령화, 실업 등 전 지구적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비영리단체 또한 보조금이나 기부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전략적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보다 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때 지속가능한 사회에 더욱 기여할 수 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탐욕적이고 비영리의 마인드는 수동적이라는 양분법적 논리는 이제 더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인 ‘제4섹터’가 등장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10여 년 전부터 제4섹터라 불리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기업, 소셜벤처, 임팩트 비즈니스가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적 이익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지역과 상생하는 비건 화장품 회사 ‘브로컬리’다. 브로컬리는 전남 화순 들국화 마을의 구절초로 만든 ‘Owndo’라는 스킨, 로션 브랜드를 런칭했고 유기농 못난이 로컬푸드를 업사이클링한 ‘어글리시크’ 브랜드로 샴푸와 린스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동물 유해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비건화장품이기도 하다. 특히 지역 특산품과 연계한 Owndo 화장품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런칭하여 5000% 판매를 달성하였고, 경북 상주와 전북 무주 등으로 점차 지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브로컬리는 뛰어난 품질로 해외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건물 외벽이나 실내 벽면에 수직 정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하며 보호종료아동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브라더스키퍼’는 보호종료아동 일자리 창출 등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보호종료아동들이 식물을 가꾸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조경 전문가로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지원, 금융 및 법률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보호종료아동 출신의 대표가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기업을 키워나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사회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미래의 우리 사회에는 서로 다른 섹터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의 가치가 융합되고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하는 하이브리드적 인재가 필요하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이러한 미래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인재에 투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2012년부터 시작한 ‘H-온드림 사회적기업 창업 오디션’을 ‘H-온드림 스타트업 그라운드’로 개편하였다. 2021년 4월부터 시작될 ‘H-온드림 스타트업 그라운드’는 영리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과 비영리인 현대차정몽구재단의 파트너십을 통해 사회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회공헌이자 인재육성 플랫폼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 여행 편에 보면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무슨 상관인가? 모르는 것의 심연에서 새로운 것만 찾아낼 수 있다면…’이라는 문구가 있다.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에 서 보니, 그곳이 영리기업이든 비영리 단체이든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여행은 해볼 만하지 않은가.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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