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비영리, 재단 등 ‘필란트로피’ 분야가 전체 GDP의 2% 수준이다. 아시아에서도 전체 GDP의 2%가 기부 등 ‘필란트로피’ 목적으로 쓰인다고 가정해보자. 5070억 달러(약 572조4000억원) 규모로, 아시아 전역으로 들어오는 ‘해외 원조금’ 보다 11배 큰 액수다(2015년 기준). 아시아의 고액자산가, 기업, 개인이 지역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을 기부하도록 할 수 있다면 훨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아시아 내 기부 및 사회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법제가 뒷받침돼야 하는 이유다.”
루스 샤피로<사진> 아시아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 센터(Center for Asian Philanthropy and Society, 이하 CAPS) 대표의 말이다. 2013년 설립된 CAPS는 아시아 내 필란트로피 맥락과 현황 등을 연구하는 비영리 연구 및 자문기구다. 지난 1월, CAPS에선 2년여에 걸친 야심찬 연구를 발표했다. 아시아 필란트로피 현주소를 짚는 ‘공익활동 환경평가지수(Doing Good Index∙이하 DGI)’가 바로 그것.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5개국의 기부 관련 제도와 정책, 생태계를 비교한 연구다.
2013년, CAPS를 설립하고 DGI 연구를 이끈 루스 샤피로 대표는 “지난 10여년간 아시아 전역의 기업가, 고액자산가에게 ‘왜 더 많이 기부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국적 불문 ‘국내 비영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며 “아시아 내 비영리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 맥락에서 필란트로피의 현황을 분석한 데이터가 나온다면, 막연한 불신을 없애고 신뢰를 높여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CAPS를 설립한 이유를 소개했다. 지난 13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DGI 결과 소개 차 한국을 찾은 루스 샤피로 CAPS 대표를 만나 아시아 필란트로피 현황과 한국의 현주소를 물었다. ☞관련기사: 비영리기관 믿을 수 없어… 자산가·기업 기부 안 늘린다
Q. 아시아에서 비영리∙사회공익단체에 대한 신뢰가 낮은 이유가 무엇일까.
“아시아의 여러 비영리단체들은 단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임팩트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 투명성 부분에서도 그렇다. 어떤 정보를 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부도 규칙을 명확하게 정하고 사회에 소통해야 하는데, 관련 법제가 복잡하고 자주 바뀌었다. 그렇다 보니, 기업이나 개인 기부자로서는 정부가 비영리 단체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닌지, 기부해도 괜찮은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시아 전역에서 굵직한 비영리 스캔들도 여러 번 터지면서 신뢰 악순환을 강화했다.”
Q. ‘아시아 공익활동 환경평가지수(Doing Good Index)’에 대해 소개해달라.
“아시아 15개국에서 기부와 관련한 제도 전반을 조사·비교했다. 해당 국가가 기부하기에 얼마나 좋은 여건인지 분석한거다. 크게 4가지 지표를 비교했다. 하나는 세금 및 재정 혜택이다. 기부를 할 때 정부가 어떤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지 봤다. 세금 혜택이 클수록, 그 정부가 더 많은 민간 기부가 이뤄지도록 장려하는 셈이다. 둘째로 기부 관련 규제 및 법 제도다. 정부와 일하는 게 얼마나 쉬운지,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거나 인증 받는 절차가 어떠한지를 분석했다.
셋째로 기부 생태계다. 사회 전반적인 인식은 어떠한지, 인재를 유치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등에 관한 부분이다. 끝으로 공익적인 미션으로 설립된 단체가 정부와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조달할 기회가 있는지 확인했다.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비영리단체로부터 조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공익단체를 신뢰한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Q. 15개국을 비교했는데, 연구는 어떻게 진행했나.
“15개 국가 내 비영리를 연구하는 기관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중국의 재단센터, 칭타오 대학 기부문화연구소, 일본의 재단연합체, 도요타재단, 인도 가이드스타, 싱가포르 경영대학의 사회리더십연구소 등 총 28곳의 연구기관과 협력했다. 한국에선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파트너로 협력했다. 한 나라당 평균 105개 기관, 총 1579명의 비영리단체 종사자를 상대로 166개 문항의 설문 조사를 진행했고, 80여명의 전문가 패널과 심층 인터뷰를 했다.”
Q. DGI 핵심 결과를 소개해달라.
“심층 인터뷰, 설문조사, 정책 및 문헌조사, 언론 보도 등을 바탕으로 15개국을 0점에서 5점으로 분류했다. 결과적으로 4점을 넘긴 곳은 없었다. 지금으로선 일본, 싱가포르, 대만에서 기부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가장 적절한 정책을 갖추고 있었다(Doing Well 그룹). 가령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기부금에 대한 세금 지원이 가장 큰 나라다.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기부금의 250%까지 소득공제를 해준다. 동시에 싱가포르 정부 산하에 있는 ‘자선 위원회’가 비영리 전반의 설립이나 운영 감독을 총괄한다. 단체로선 상대해야 할 정부 부처가 하나로 통일되어있어 행정 비용 낭비가 적고, 정부는 단체들이 보다 용이하게 기부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거다. 세 나라 모두, 법제나 행정 절차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다.”
Q.다른 나라는 어떤가.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한국 등이 ‘Doing Better’ 그룹에 속했다. 기부 문화를 장려하기 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정책적으로 미비한 부분이 있거나 복잡한 경우다. 중국이나 인도, 파키스탄 세 나라는 그보다 낮은 ‘Doing Okay’에 해당한다. 이 세 나라에선 최근 몇 년간 기부금에 관한 여러 법제나 규제가 만들어졌는데, 기부 문화를 장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중국에선 최근 통과된 ‘자선법(Charity Act)’에선 비영리단체에서 쓸 수 있는 행정비용을 10%로 제약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지난해부터 해외에서 들어오는 기부금에 대한 규제를 뒀다.
끝으로 인도네시아와 미얀마는 최하위 그룹인 ‘Not Doing Enough’에 속한다. 두 나라 모두 민간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사회 인프라가 없다시피 하다. 미얀마에서는 개인이건 기업이건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이 전무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비영리 단체를 운영한다고 해도 세금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고, 기업 기부자에게만 세금 혜택을 제공한다.”
Q 아시아 15개국 필란트로피 환경을 짚었다. ‘아시아 필란트로피’의 특징을 꼽자면.
“아시아 필란트로피의 두드러진 특징은 비영리기관·기업·정부 사이에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거다. 기업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춰 기부했고, 정부에 반하는 성격의 활동에는 기부하지 않았다. 서구의 ‘필란트로피’ 양상과는 굉장히 다르다. 그렇다보니 아시아에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부금이나 비영리 단체에 제공하는 세제 혜택을 늘린다는 것은, 공익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우회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아시아 정부로서는 기부문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만들 유인도 높다. 정부가 해결하려는 분야로 더 많은 민간 기부금이 들어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Q 한국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한국에선 필란트로피 생태계가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커졌다. 이 분야를 지원하는 기업 자금도 늘었고, 필란트로피∙사회적기업∙CSR을 다루는 학과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한국은 규제 시스템이 복잡하고 어려운 나라로 손꼽혔다. 관련 법이 쪼개져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영리단체 입장에선 상대해야 하는 정부 기관 수도 가장 많았다. 주무부처 15곳, 그 밖의 지자체나 정부 산하 공공기관까지 포함하면 최소 35개 각기 다른 기관과 상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세제 장려 정책도 미흡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소득공제가 아닌 세액공제를 하는 나라다. 현재 개인은 소득의 30% 한도 내에서 15%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기업은 100% 기부금에 대한 세액공제를 해주지만, 10% 한도를 뒀다 보니 미미한 수준이다. 비영리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의 방증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경제 수준 대비, 필란트로피 관련 법제가 일관성이 없고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고 공익법인 관련 법제를 개편하려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안다. 법제와 정책이 보완된다면 필란트로피 공익 생태계가 이전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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