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비영리기관 믿을 수 없어… 자산가·기업, 기부 안 늘린다

루스 샤피로 아시아 필란트로피전문 연구센터 대표

“지난 20여 년간 아시아 내 고액 자산가나 기업가들을 많이 만났다. ‘왜 더 많이 기부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국적 상관없이 돌아오는 답이 똑같았다. 자국 내 비영리단체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다. 민간 기부를 촉진하기 위해선 낮은 신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봤다. 아시아 필란트로피 연구가 그 시작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루스 샤피로〈사진〉 ‘아시아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 센터(Centre for Asian Philanthropy and Society, 이하 CAPS)‘ 대표의 말이다. 2013년 설립된 CAPS는 아시아 내 필란트로피(자선)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내년 1월, 한국·일본·중국·인도 등 아시아 15국 기부 문화 제도와 환경을 비교한 연구 ‘공익활동 환경평가지수(Doing Good Index)’ 발표도 앞두고 있다. CAPS를 설립한 샤피로 대표는 1997년에 아시아 내 주요 기업인들의 모임인 ‘아시아 비즈니스 위원회’를 설립하고 10여 년간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시아 내 기업 고위 네트워크를 이끌었던 ‘기업통(通)’이 ‘필란트로피 전문 연구기관’을 설립한 이유가 뭘까. 지난 7일, 아름다운재단 기빙코리아 기조 강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에게 아시아 필란트로피의 특성에 대해 물었다.

ⓒ아름다운재단

―10년 가까이 아시아 내 기업가 네트워크를 이끌었는데, 아시아 ‘필란트로피’ 전문 연구기관을 설립한 이유가 궁금하다.

“두 조직 모두 비슷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었다. 아시아 비즈니스 위원회를 설립했던 1997년은 외환 위기가 일어났던 해였다. 대량 해고, 실업 등 사회문제가 떠올랐고, 아시아 각국에서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기업들을 모아 사회적인 역할을 논의하기 위해 만든 네트워크 조직이 ‘아시아 비즈니스 위원회’였다. 이후 10여 년간 고액 자산가·기업가와 네트워크를 맺으면서 아시아에선 비영리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낮다는 걸 확인했다. 대부분 ‘(더 많이) 기부하지 않는 이유’로 ‘비영리를 믿기 어렵다’고 했다. 낮은 신뢰 문제를 해결해야만 더 많은 민간 자산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시아 필란트로피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봤다.”

―아시아 기부 문화(필란트로피)가 갖는 차이점이 있다면.

“아시아 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30개 사회공익단체 사례를 심층 연구했다. 비영리기관·기업·정부 사이에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기업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춰 기부했고, 정부에 반하는 성격의 활동에는 기부하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에서 비영리단체와 정부는 대체로 협력적인 관계였다. 서구의 ‘필란트로피’ 양상과는 굉장히 다르다.”

샤피로 대표는 비영리(NPO)·비정부단체(NGO)라는 단어 대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공익단체(Social Delivery Organization)’로 표현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NGO라 불리는 대부분의 단체는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어 비정부(NGO)라 보기 어렵고, 사회적기업처럼 영리 속성을 가진 곳이 늘고 있어 비영리(NPO)라고 한정 짓기 어렵다”는 것.

그는 “아시아에 존재하는 ‘사회적 합의’가 갖는 임팩트 또한 크다”고 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할 때 중요한 두 가지는 규모를 키우는 것과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부를 끌어들이는 것은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임팩트가 크다. 정부로서도 필란트로피 활성화를 위한 제도를 갖출 유인이 크다고 본다. 기부가 활성화된다면, 더 많은 자금이 정부가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 해결에 쓰이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CAPS에서는 야심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시아 15국 내 기부 문화와 관련한 제도 전반을 조사·비교하는 ‘공익 활동 환경평가지수(Doing Good Index, 이하 DGI)’ 연구에 나선 것. 기부 문화와 관련한 제도, 세금 혜택, 자금 조달, 기부 생태계 등 4개 항목을 비교해, 해당 국가가 기부하기에 얼마나 좋은 여건인지 보여준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오는 1월에 발표된다.

―아시아 필란트로피의 전반적인 트렌드는 어땠나.

“아시아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중국·인도·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다. 동시에 교육, 빈곤, 환경 등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도 많다. 비교 연구 결과, 지난 몇 년간 많은 국가에서 민간 자금이 사회적으로 쓰이도록 세제 혜택이나 법제를 도입했다. 가령 인도에선 기업이 순수익의 2%를 필란트로피 활동에 의무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법안이 이미 시행 중이고, 네팔도 인도와 비슷한 ‘1%’ 법안을 막 제정했다.”

―15국의 기부 관련 제도를 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작업했는가.

“아시아 내 기부 관련 데이터가 전무해 제로(zero)에서 시작했다. 각 지역의 대표적인 비영리 연구 파트너 기관과 함께 작업했다. 일본의 재단연합체와 도요타 재단, 중국의 파운데이션센터, 칭다오대학의 기부문화연구소, 싱가포르 경영대학 등과 함께했고, 한국은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파트너로 참여했다. 1600개 이상의 사회공익단체를 조사했고, 90여 명의 전문가를 인터뷰했다.”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기부지수(World Giving Index)‘와는 어떻게 다른가.

“세계기부지수는 전 세계 1000명의 시민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값을 평가해 국가별 순위를 매긴다. 지난 1년간 낯선 사람을 도와준 경험이 있는지, 기부를 했거나, 자원봉사를 했는지 ‘개인 경험’을 묻는 거다. 호의를 베푸는 사회적인 문화 전반을 가늠해볼 순 있지만, 그렇게 쓰인 돈이 사회적인 목적으로 쓰였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가령 길거리 낯선 사람에게 돈을 줬다고 해서 그 돈이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였다는 걸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DGI는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닌, 필란트로피 영역의 ‘인프라’와 ‘제도’를 본다는 데서 세계기부지수와는 완전히 다르다. 기부와 관련한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개인이나 기업에게 기부에 참여할 유인이 크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등을 본다. 세계은행이 국가별로 기업 경영 환경을 따져 발표하는 ‘기업환경평가(Doing Business)’에서 착안했다.”

―한국의 기부 환경은 어떤가.

“한국에선 회원제에 기반한 어드보커시(advocacy·옹호) 단체가 역사적으로 강했던 편이다. 필란트로피 생태계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사회공익단체 수도 크게 늘었고 아시아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적기업이 호황이다. 필란트로피나 기업 CSR에 대한 대학 과정도 늘었다. 다만 과제도 있다. 정부와 재벌, 사회공익단체 간 신뢰가 특히 낮은 편이다. 필란트로피 관련 법률 체계가 혼란스럽다는 점도 한국 내 기부 문화를 저해하는 요소다.”

―한국의 필란트로피가 좀 더 성장하려면,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세제 혜택은 정부가 기부 문화를 장려한다는 걸 보여주는 신호다. 한국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 비해 세제 혜택이 현저히 낮다. 대부분의 국가에선 100%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개인은 15%, 기업엔 10% 수준이다. 정부가 세제 혜택을 장려한다면 민간 자금이 훨씬 더 유입되리라 본다. 또한 사회공익단체 전반의 책무성과 투명성이 높아져야 한다. 지난해 드러난 K스포츠·미르재단은 정부가 공익법인을 사적인 목적으로 유용했고, 기업들이 정부 방향에 맞춰 기부했던 대표적인 사례다. 단지 재벌이 사적 목적으로 활용하느냐 여부를 떠나, 전반적인 책무성이 높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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