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폐렴 백신 있는데, 왜 매년 100만명이나 목숨을 잃을까요?”

엘스 토릴 국경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총괄 인터뷰

화이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 글로벌 제약회사에 필수의약품 가격 인하, 복제약 연구 지원하기도 

“제네릭(복제약)의 글로벌 접근성 제한 말라.”

최근 인천에서 16개국이 모인 제20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의 화두였다. 국제 의료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는 한국과 일본 정부에게 “적정 가격으로 형성된 복제약의 접근성을 제한하는 조항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RCEP은 세계 인구의 절반 가량에 영향을 미치는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이번 회의에는 아세안(ASEAN) 10개국과 자유무역 협력국인 한국, 일본,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에서 지난 17~28일까지 참가했다. 

국경없는의사회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정부는 제약사들의 지적재산권 보호를 확대해 각 기업의 영향력을 연장하는 조항을 RCEP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이는 복제약을 통한 시장 경쟁과 무역을 제한, 필수의약품 접근성을 더 낮추는 ‘개악’이라는 게 국경없는의사회의 입장이다. 

제약사들의 가격 구조와 필수의약품 접근성.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지난달 27일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개발도상국백신제조사네트워크(DCVMN)’ 컨퍼런스 참가를 위해 방한한, 엘스 토릴(Els Torreele) 국경없는의사회 캠페인 총괄을 만났다. 그녀는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를 위한 캠페인(이하 ‘액세스 캠페인’)을 책임지고 있다. 엘스 토릴은 생명공학 연구자와 비영리단체 활동가로 시작, 소외의약품 개발 비영리단체 공동 창립자를 거친 바 있다. 그녀가 털어놓는 필수의약품 접근성의 실태, 왜곡된 의약품 가격 책정 구조 등을 들어보자. 

◇1만달러에서 100달러로 낮아진 치료제, 수십만 목숨 살려

지난달 27일 엘스 토릴 국경없는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총괄이 ‘DCVMN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토릴 총괄이 이끄는 ‘액세스 캠페인’은 199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수익금으로 시작하게 된 캠페인이자 국경없는 의사회 산하기구다. 개발도상국에서 꼭 필요한 약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도록 제약회사 등을 압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을 하는 곳이다. 

2015년에는 백신 가격 보고서도 발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인당 백신가는 2001년보다 68배나 더 높아졌으며, 많은 나라들이 폐렴 예방에 필요한 고가의 신약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엑세스 캠페인은 어떻게 시작됐나.

“액세스 캠페인은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모여 생겨난 조직이다. 전 세계에 수많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들이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는데, 이들은 제 3세계 구호 현장에서 의약품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약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우리의 도움을 받는 환자들을 비롯,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구명 의약품, 진단 검사, 백신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키고자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리는 제약회사들과 각국 정부들에게 필수의약품 가격을 낮추고 복제약 제조 및 유통을 허가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엔 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의 연례 주주총회 하루 전날, 본사 앞에 모여 약 40만 명의 이름이 적힌 서명서를 전달했다. 이 서명서는 모든 저소득 국가들과 인도주의 단체들에 대해 폐렴 백신 가격을 아동 1명당 미화 5달러까지 낮춰 줄 것을 화이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 두 제약회사에 요청하는 것이다. 예방할 백신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폐렴은 많은 저소득 국가의 주된 아동 사망 요인이다. 해마다 거의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지난해 화이자 제약 앞에서 서명에 동참한 사람들은 아동들의 생명보다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화이자 최고경영자, 이사회, 주주들에게 강력히 전달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화이자, GSK 등 제약사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이런 액세스 캠페인 활동을 통해 그동안 어떤 성과들이 나왔나.

“물론 우리의 요구 전달 이후 약값이 바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약사들이 큰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공개 캠페인, SNS 및 언론 홍보, 제약사와의 직접적인 대화 등 다각적인 방법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덕분에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폐렴구균 백신의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 하지만 백신이 미국에선 100달러, EU에서는 20-60달러로 아직 다소 비싸 캠페인을 더 진행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우리의 투쟁은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이즈 치료제(바이러스 활동을 억제해 바이러스 전파를 막고 면역체계 파괴로 인한 고통을 막을 수 있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를 없애진 못함) 가격 인하다. 90년대, 한 사람이 에이즈 치료제 구입으로 1년간 1만불을 지불해야 했던 가격이 지금은 1인당 100달러 정도로 확 낮아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 에이즈는 불치병이 아닌 난치병이 됐다.”

-필수의약품 캠페인은 제약사와 정부에게 압박을 가하는 캠페인 활동 외에, 복제약 연구를 지원하여 경쟁을 통한 의약품 가격 인하도 이뤄내고 있다고 들었다.

“맞다. 에이즈 치료제 케이스도 제약사에게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고 복제약을 개발해 약품 가격을 낮춘 것이다. 에이즈 치료제는 1998년 개발됐는데, 당시 일부 제약사들이 제조 및 공급을 독점해 가격이 매우 높았다. 때문에 사하라 이남 지역, 남아공, 태국, 인도, 브라질 등 제 3세계에서 에이즈가 창궐했지만 약을 써보지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에 우리는 인도 제약사와 함께 복제약 연구에 매진했고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인도 의약품 시장에 먼저 출시해 제약사들의 가격경쟁을 이끌었고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 에이즈 치료제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시장 왜곡’… 기업은 과도한 이윤추구 지양하고 정부는 관리감독 잘해야

액세스 캠페인은 에이즈 치료제 사례 외에도 폐렴구균 백신, C형 간염 치료제 등의 가격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C형 간염 치료제의 경우 제약사와의 협상을 통해 미얀마, 캄보디아 등 의료 빈민국 등에선 1회 투약 가격을 300달러 선으로 낮춰 유통했다. 하지만 그는 “300달러는 개발도상국 국민들에게 아주 큰 돈”이라면서 “앞으로 캠페인을 통해 가격을 더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아직도 많은 필수 치료제가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면서 “이는 제약업계가 건강보험을 이용해 과도하게 이윤 추구를 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필수 의약품 관리 체계에 구멍이 있음을 의미하는 바”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27일 플라자 호텔에서 엘스 토릴 총괄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영

-희귀병 치료제는 약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적고 연구개발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가 가격이 다소 비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필수의약품의 가격도 높게 책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제약사의 과도한 이윤 추구 때문이다. 제약사는 영리기업이기 때문에 신약을 만드는 경우 지적 재산권을 가지고 독점을 누리게 된다. 소위 부르는 게 값이 되는 셈이다. 얼마 전 C형 간염 치료제가 개발됐으나 미국 출시 가격이 무려 8만4000달러(약 9450만원)였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국민들도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다. C형 간염은 예방백신이 없고, 감염되더라도 초기 증상이 식욕 감퇴, 피로감 등으로 미미해 조기 발견이 매우 어렵다. 감염된 지 20~30년 지나 간경변이나 간암 등의 중증 간질환으로 진행된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감염 시 70~80%의 비율로 만성화가 된다. 또 전 세계 C형 간염 보균자가 약 70만명이나 된다.”

-이렇게 가격이 비싸면 약이 잘 팔리지 않아 제약사도 손해를 보지 않나.

“아니다. 건강보험 제도가 잘 돼 있는 선진국에선 필수의약품의 경우(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약값이 매우 비싸더라도 약값 대부분을 정부에서 지원해준다. 이 때문에 제약사들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대체로 건강보험의 혜택을 통해) 약을 구입할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약값을 높게 책정하는 것이다. 많은 제약사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 수익을 늘려왔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전 세계에서 모은 청원서를 전달할 때, 화이자 본사 앞에는 2500송이의 꽃들이 놓였다. 이는 날마다 폐렴으로 목숨을 잃는 아동들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

-필수의약품의 경우 정부가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많은 나라들이 특허권을 풀어주는 ‘제네릭(복제약) 약 개발 허용’을 택하고 있다. 단순히 가격을 제한하는 규제 중심의 정책보다 자유 경쟁을 통해 가격을 낮추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필수의약품의 경우 신약의 특허권을 정부가 풀어주는 ‘공공재산권’을 도입해 실행 중이다. 한국도 복제약 개발과 유통이 자유롭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자유 경쟁만으로 가격이 다 낮춰지는 것은 아니다. 제약사들끼리 담합을 하거나 복제약이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는 경우 약은 여전히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다시 말해 문제는 왜곡된 의약품 시장구조다.

사실 신약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책정되는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싼 경우가 많다. 이는 의약 개발 시스템이 수요자 필요에 따라서가 아닌, 이윤 중심으로 구축됐기 때문이다. 본래 제약은 공공성이 강한 산업인데 현재 대부분의 제약사들은 환자와 약의 관계를 비즈니스적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환자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 구매자로만 본다는 뜻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선 왜 제 3국가에 저렴한 가격으로 필수의약품을 제공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질병의 신약 가격을 낮춰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관리체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지금처럼 복제약 제조 시장을 열어놓되 윤리적 제약회사 연구개발에 대한 공공기금 투자, 가격 담합, 독과점에 대한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 등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 신약 개발에 따른 혜택과 공공이익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어느 정도 필요하단 뜻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곳에 정부기금을 투입하면서 신약 개발 비용, 지속가능경영 정보 등을 공시하게 하고 합리적 가격에 약을 팔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제약회사는 부족한 연구개발 비용을 충당할 수 있고 정부는 윤리적 기업을 키워 나아가 왜곡된 의약품 가격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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