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를 보지 못한 채 서로 다른 부분을 만져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 같다고 했고, 코를 만진 사람은 뱀 같다고 했다.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했다. 각자의 설명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코끼리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금융도 한 사람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살핀다. 신용점수, 소득, 부채, 연체 이력. 모두 필요한 정보다. 지금까지 돈을 어떻게 빌리고 갚아왔는지, 부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다만 그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알기 어려운 것도 있다. 왜 빚이 생겼는지, 그 뒤로 무엇을 해왔는지, 지금 필요한 돈으로 무엇을 바꾸려는지다.
그런 사정까지 금융이 알아야 할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일에, 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이 왜 필요할까.
필자가 일하는 사회연대은행은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대출과 자립 지원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비영리 사회적금융기관이다. 이곳을 찾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신청자는 미성년 자녀 둘을 키우는 한 부모 가장이었다. 이혼 후 5년 동안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고, 주말에는 녹즙과 우유를 배달했다.
그러던 중 예상하지 못한 빚 문제로 급여 통장이 지급 정지됐다. 비슷한 시기, 장마에 살던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겼다. 보호시설에 들어갔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지낼 수는 없었다. 시설의 특성상 큰아들은 지인의 집에서 따로 지내야 했다.
이듬해 LH 임대주택 입주 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입주에 필요한 본인부담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개인회생 절차를 밟고 있던 그는 은행과 저축은행, 정책금융 창구를 찾았지만 대출받지 못했다.
여러 창구에서 돌아선 그가 신청서를 낸 곳은 사회연대은행의 ‘함께온기금’이었다. 후원금과 먼저 대출받은 이들의 상환금을 재원으로, 2024년부터 상시 대출을 운영하는 기금이다.
신청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어떻게든 제가 바로 서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돈은 어떤 돈일까. 그 돈이 쓰일 곳에는 가족이 다시 함께 지낼 집이 있었다. 입주 대상자로 선정된 것과 실제로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사이에, 마련하지 못한 본인부담금이 놓여 있었다.
‘개인회생 중’이라는 사실만 읽을 때와 여기까지의 사정을 함께 읽을 때, 확인해야 할 것은 달라진다. 지금 어떤 부담을 감당하고 있는지, 필요한 자금이 얼마인지, 그 돈으로 주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 이후의 생활과 상환을 함께 이어갈 여력이 있는지. 한 줄의 기록에서 멈췄던 질문이 그 사람의 현재와 앞으로의 생활로 이어진다.
사회연대은행은 이런 사정을 판단에 담기 위해, 함께온기금을 시작하면서 신청서에 질문 한 줄을 더했다.
“당신에게 왜 이 돈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돈의 액수뿐 아니라 그 돈이 필요해진 과정도 이야기하게 된다. 언제부터 생활이 어려워졌는지,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가 함께 나온다. 흩어진 숫자와 기록 사이에 맥락이 생긴다.
같은 빚이라도, 아직 고비를 넘기지 못해 빚이 늘어가는 사람과 그 고비를 넘기고 조금이라도 빚을 줄여나가는 사람의 상황은 다르다. 그 차이는 앞으로 갚을 가능성과 지금 필요한 도움에도 영향을 준다. 돈을 빌려주는 일이 그 사람의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을지 살피려면,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이해는 사연을 듣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신청자가 설명한 상황을 소득과 부채, 현재의 상환 부담, 실제로 해온 일과 함께 살피는 것이다. 필요한 돈이라고 해서 곧 감당할 수 있는 돈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류에 미처 쓰지 못한 사정도 있고, 신청서를 낸 뒤에 달라진 상황도 있다. 직접 묻고 답을 듣다 보면 처음의 이해를 고쳐야 할 때도 생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더 묻고, 확인하고, 판단을 수정할 여지를 남겨두는 일이다.
우리는 이 방식을 ‘관계형 금융’이라고 부른다. 금융권에서 관계형 금융은 흔히 은행이 중소기업과 오랜 거래를 통해 쌓은 정보를 바탕으로 장기 대출을 제공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우리가 말하는 관계형 금융은 개인을 대상으로 한다. 신용점수와 소득, 부채, 상환 이력을 기초로 삼되, 대화에서 듣고 확인한 사정과 행동, 계획을 판단의 근거에 더하는 금융이다.
다시 한 부모 가장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연을 알고 나면 5년 동안 평일과 주말을 나누어 일한 시간이 다시 보인다. 개인회생이라는 기록과 함께 그 사람이 생활을 이어오기 위해 해온 일이 보인다. 돈이 필요한 이유와 앞으로 하려는 일을 함께 살필 수 있게 된다. 무엇으로 갚을 수 있는지, 필요한 돈이 그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지 판단할 근거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청자만 이런 문 앞에 서 있었을까. 다른 신청서에는 가족의 병원비가, 또 다른 신청서에는 실직과 생계비가 적혀 있었다. 사연은 저마다 달랐지만, 여러 창구를 거쳐 도착한 자리는 비슷했다.
사연은 이렇게 다른데, 왜 금융의 답은 모두 거절이었을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멈춰 섰다면, 그 이유는 개인의 사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금융의 구조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다음 글에서는 사회연대은행이 카카오뱅크와 함께 진행한 청년 대출 사업 ‘프로젝트 다시, 봄’에 신청한 청년 1432명을 만난다. 이들 대부분은 일하고 있었고, 매달 빚을 갚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다시 돈을 빌려야 했을까.
김세권 사회연대은행 미래사업부장
필자 소개
사회연대은행 미래사업부장입니다. 사회연대은행은 한 사람이 겪어온 일과 해온 노력, 앞으로의 계획까지 살펴 신용을 평가하는 '관계형 금융'을 실천합니다. 신용점수와 소득, 부채 이력만으로는 왜 돈이 필요하고 어떻게 갚을 수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취약계층과 청년의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금융 지원 사업을 총괄해 왔습니다. 신용점수 너머의 정성적 정보가 신용 평가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답을 관계형 금융의 현장에서 찾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