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 발언대] 성수동을 걸으며, 다시 뉴욕으로 향한다

매일 아침 성수동을 걸어 출근하다 보면 유난히 자주 모습이 바뀌는 한 모퉁이 공간을 지나게 된다. 마치 시계가 돌아가듯 그곳은 팝업스토어에서 또 다른 팝업스토어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어느 아침에는 알록달록한 카페와 옷가게 사이로 새하얀 벽만 드러낸 채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전혀 다른 콘셉트의 공간으로 바뀌어 화장품이나 향수, 때로는 냉감 제품 같은 새로운 상품들로 가득 찬다. 다음 날에는 화보 촬영이 진행되고, 며칠 뒤에는 모퉁이를 휘감는 긴 줄이 생긴다. 그렇게 한두 주가 지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필자는 미국 헨리 루스 재단(Henry Luce Foundation)이 운영하는 국제 펠로십인 ‘루스 스칼라(Luce Scholar) 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2025년 9월 뉴욕에서 서울로 왔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청년 전문가를 아시아 각국의 기관에 약 1년간 배치하고 체류비와 언어교육 등을 지원한다. 필자는 임팩트 액셀러레이터이자 투자·컨설팅 기관인 엠와이소셜컴퍼니(MYSC)에 배치돼 1년간 근무하게 됐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뉴욕시 정부에서 3년간 근무했다. 처음에는 택시와 차량호출 산업 종사자들을, 이후에는 여러 업종의 소상공인을 지원하며 기업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일을 했다. 한국행을 준비하면서는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 관한 국제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해 온 이유가 궁금했다.

공공 부문에서 일할 때 비즈니스란 주로 소상공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MYSC에서 근무하며 스타트업과 사회적기업,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조직까지 아우르는 더 넓은 비즈니스 생태계를 이해하게 됐다.

성수동은 흔히 ‘소셜벤처 밸리’라고 불린다.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환경적 변화를 만들려는 소셜벤처와 사회적기업, MYSC와 같은 중간지원조직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서 일하고 걷는 날들이 쌓이면서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공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코워킹 스페이스와 새로운 제품·서비스를 시험하는 실험 공간, 어느 건물에 적힌 “MAKE IMPACT YOUR PASSION”이라는 문구까지. 성수동이 소셜벤처 밸리로 불리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 사회혁신과 경제적 포용을 만드는 비즈니스

MYSC에서 근무하며 사회적 목적을 지닌 기업이 어떻게 사회혁신과 경제적 포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더욱 선명하게 목격했다. 특히 고령화와 돌봄 분야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 11월에는 MYSC가 기술 지원을 맡은 ‘유엔여성기구 코리아 임팩트 스튜디오 온 케어(UN Women’s Korea Impact Studio on Care)’에 참석했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벤처투자자와 스타트업이 사흘 동안 모여 노인 돌봄과 샌드위치 돌봄이 초래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며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참여 기업들은 기술 기반 서비스부터 돌봄 인력과 가정을 연결하는 플랫폼까지 다양한 사업모델을 소개했다. 한국 스타트업 휴브리스(Hubriz)는 돌봄이 필요한 가정과 인력을 연결하는 동시에 중년 여성과 이주 여성의 돌봄 노동을 공식적인 일자리로 만드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격 인증과 교육, 성과 기반 평가를 통해 그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돌봄 노동을 전문 직업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돌봄의 공백을 메우면서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하는 사업이었다.

뉴욕시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돌봄 제공자를 지원하는 한 비영리단체의 프로그램 평가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개입과 지원책도 뿌리 깊은 구조적 장벽 앞에서는 충분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기에 아시아 스타트업들이 제시한 사업모델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돌봄처럼 어느 한 부문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사회문제에서 임팩트 스타트업이 기존 정책과 제도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 한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를 지원하는 일

한국에는 3000개가 넘는 사회적기업과 그보다 더 많은 소셜벤처가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빠르게 성장한 한국의 사회적경제 생태계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한국 사회연대경제의 제도화는 1997년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시작됐으며,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2015년 이후에는 액셀러레이터와 임팩트 투자기관, 소셜벤처가 등장하며 생태계가 한층 다양해졌다.

MYSC에서 액셀러레이팅과 임팩트 투자, 컨설팅이라는 세 가지 수단을 통해 사회적 임팩트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배운 것은 MYSC가 스스로를 ‘생태계 조성자(ecosystem builder)’로 정의한다는 점이었다.

생태계 조성자의 역할은 개별 기업의 성장을 돕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혁신 생태계의 다양한 주체를 국내외에서 연결하고, 임팩트가 가장 크게 창출될 수 있는 곳에 투자하며, 여러 이해관계자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조직 안팎에서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내기업가들의 공동체를 키우는 일도 포함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을 연결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연결하는가’였다. MYSC는 관계와 공동의 경험, 신뢰를 세심하게 쌓으며 연결을 만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생태계 조성자의 역할이 정원사의 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정원사는 식물을 대신해 자라줄 수 없다. 다만 각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도록 토양을 돌보고 물과 햇빛이 닿는 환경을 만든다. 사회혁신도 다양한 주체가 변화를 만들고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가꿀 때 성장한다.

◇ 하나의 동네를 이루는 서로 다른 층위

퇴근길에 지하철역에서 조금 더 멀어지면 뉴욕에서부터 익숙하게 느꼈던 비즈니스의 풍경이 나타난다. 저녁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국어 숙제를 해도 편히 앉아 있으라고 말해주는 오리고깃집 사장님이 있다. 늘 초밥 한 점을 더 얹어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주는 초밥집 사장님도 있다. 가게의 역사를 적은 안내문을 내건 신발 가게도 있다. 뉴욕에서 가장 쉽게 알아보고 친숙하게 느꼈던 비즈니스는 바로 이런 가게들이었다.

그러나 1년 가까이 성수동에서 생활한 지금은 그 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주체들도 보인다. 사회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소셜벤처와 스타트업, 이들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중간지원조직과 임팩트 금융기관들이다.

빠르게 새로운 실험에 나서는 기업, 오랫동안 관계와 신뢰를 쌓아온 소상공인, 새로운 해법에 도전하는 소셜벤처와 이들을 연결하는 기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경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1년을 마치고 필자는 곧 뉴욕으로 돌아간다. 성수동에서는 역동적인 창업 생태계가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주체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연결될 때 성장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이곳에서 얻은 시선을 뉴욕으로 가져가 그곳의 더 나은 창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보태고 싶다.

크리스티나 발레로스 엠와이소셜컴퍼니 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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