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네이버스 세계시민교육
가양초교 전 학급 ‘세계시민교육’… 각 반마다 해외 아동 한 명씩 후원
불쌍한 빈곤국 아이 돕는 것 아닌 소중한 외국인 친구 한 명 얻은 것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학교는 조용했다. 간간이 교실에서 새어나오는 교사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밝은 색깔로 꾸며진 복도와 영어수업을 위한 특별공간인 ‘English Zone’까지, 지난달 22일에 찾은 서울 가양초등학교는 여느 초등학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니 특이한 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각 교실 문 옆에 붙어 있는 여러 나라 아이들의 사진이었다.
가양초등학교는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가 ‘지구촌 이웃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세계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만든 학생 교육 프로그램 ‘세계시민교육’을 전 학급에서 실시한다. 이 학교는 올해부터 교내에서 세계시민교육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반마다 아동 한 명씩을 후원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교실 문 옆에 걸려 있는 해외 아동의 사진은 그 반 아이들이 결연 후원하고 있는 ‘친구’다.
아프리카 중부 내륙국 ‘차드’에 사는 오데뜨 샤흘바 폴(Odette Sahoulba Paul)의 사진이 걸려 있는 3학년 1반은 마침 ‘세계시민교육’이 한창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22명의 아이들이 다 같이 손을 번쩍 들고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까지 숫자를 세고 손을 내리자 세계시민교육을 위해 나온 굿네이버스 전문강사 황화영(26)씨가 “우리가 이렇게 다섯을 세는 동안 여러분의 친구 한 명이 죽었어요”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진짜요?”를 연발했다.
교실이 어수선한 사이 황씨는 컴퓨터와 대형TV를 이용해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새천년개발목표(MDGs)의 8가지 조항이 TV 화면에 나왔다. 어린아이들도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조항은 간단한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다 같이 따라 읽자”는 황씨의 말에 아이들은 ‘무서운 질병이 모두 사라진 세상’과 같은 문장을 힘껏 외쳤다. 몇몇은 새천년개발목표를 공책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MDGs의 기본개념을 익힌 아이들은 다른 나라 친구들에 관한 영상을 시청했다. 엄마가 에이즈에 걸린 아프리카 케냐의 레이첼과 껌을 팔고 신문을 배달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에티오피아의 데멜라쉬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웅덩이의 더러운 물을 그냥 마시는 걸 보며 아이들은 “저런 물 마시면 아플 텐데…”라고 나지막이 말을 하기도 했다.
3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22명 열살 개구쟁이들의 변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누려야 하는지, 다른 나라의 또래 친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배우고 난 후 가진 ‘퀴즈시간’에 아이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우리가 마음껏 공부하며 꿈을 키울 수 있는 OO가 필요해요’라는 첫 퀴즈에 80% 이상이 손을 들고 “저요, 저요”를 외쳤다. 처음 발언권을 얻은 아이가 바로 ‘학교’라는 답을 맞혔다. 다음 퀴즈로는 ‘전염병 예방 OO와 모기를 막아줄 OOO이 필요합니다’라는 질문이 나왔다. 아이들은 첫 번째 빈칸에 들어갈 ‘주사’는 금방 맞혔지만 두 번째 빈칸에 들어갈 단어는 계속해서 오답을 말했다. 모기약, 에프킬라, 예방약을 거쳐 한 명이 ‘모기장’을 말하자 교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지만, 몇몇은 교실에 남아서 오늘 들었던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성원(9)이는 “과자 한 봉지 안 먹으면 다른 친구 한 명을 살릴 수 있겠죠?”라고 뭔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충복(9)이는 어른처럼 “모금 운동 같은 것을 해봐야겠어요”라며 더 큰 계획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현영(9)이는 3학년 1반이 도와주고 있는 오데뜨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꼬박꼬박 모은 용돈으로 다른 친구를 도울 수 있어서 뿌듯해요”라며 “앞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더 많이 도와야겠어요”라고 의지를 다졌다.
이 같은 아이들의 변화는 가양초등학교 박인화(53) 교장이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과 일치한다. 사실 가양초등학교는 전교생의 20%가량이 정부 지원을 받는 ‘교육복지특별지원학교’다. 북한에서 온 새터민의 자녀도 30명 남짓 되고, 무상급식 혜택을 받는 아이들은 100명이 넘는다. 하지만 박 교장을 비롯한 가양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세계시민교육과 아동결연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들도 어렵지만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3학년 1반의 담임 김선미(39) 교사는 아이들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낀다고 했다. 김 교사는 “오데뜨를 후원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부모님께 그냥 돈을 받아오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 한 가지씩을 하고 돈을 받아와야 한다”라며 “자기 스스로 마련해서 남을 돕는다는 사실에 아이들의 표정이 굉장히 밝다”라고 말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나눔과 기부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고 ‘세계시민’으로 성장해나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세계시민교육의 핵심은 학교를 벗어나 가정에서 이뤄지는 ‘간접교육’에 있다.
3학년 1반의 ‘나눔’과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나눔대표’인 혜준(9)이는 굿네이버스에서 제공한 동영상 CD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옆 동에 사는 친한 친구 연주(9)도 함께였다. 혜준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거 같이 봐요”라며 엄마 방근영(41)씨를 불러 세웠다.
혜준이가 친구와 엄마와 함께 본 영상에는 캄보디아의 락스미(10) 이야기가 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오리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근처 ‘킬링필드’ 유적지에서 구걸하는 모습에 모두들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방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나눔교육’을 받는다고 했을 때 막연히 짐작만 했는데, 이 동영상을 보면서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라며 “아이 아빠와도 같이 보고 어려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얘기해봐야겠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시작된 나눔교육이 가정까지 이어져 한 가족이 변하는 시발점이 됐다.
영상을 다 보고서 혜준이와 연주는 엄마가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락스미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희망편지 쓰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락스미를 비롯해 24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쓴 아이들의 편지는 심사를 거쳐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이 된다. 편지쓰기 대회의 수상자 중 일부는 직접 락스미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혜준이는 ‘오리 사육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힘들겠다. 너도 열살이잖아’라며 하고 싶은 말을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
편지를 다 쓴 혜준이가 “오데뜨의 꿈이 비행기 승무원이었지?”라고 연주에게 물었다. 연주는 “응, 맞아. 내 꿈은 의사인데!”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네 짝꿍 꿈이 뭐랬지?’라는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눔 교육이 왜 어릴 때부터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불쌍한’ 오데뜨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명의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는 듯이 행동했다. 진정한 ‘세계시민’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