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필란트로피는 흔히 ‘부유한 개인의 선의’에서 출발한 것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역사와 제도적 토대 위에서 형성돼 왔습니다. 봉건제와 군주제를 거치지 않은 사회에서 자발적 결사와 자선은 공공의 빈틈을 메우는 방식으로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이는 개인의 기부와 비영리 조직이 정치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다트머스 판결은 비영리 조직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제도적으로 확정했고, 지라드 유언 판결은 기부자의 의도(donor intent)가 공익의 틀 안에서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법적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조직이 오래 지속되고, 기부의 의도가 시간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개인 기부와 개인재단 중심의 구조는 하나의 제도적 선택지로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레거시 재단과 수많은 개인·가족 재단은 단발적 자선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공익 장치’로 성장해 왔습니다.
이제 질문은 한국으로 넘어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단을 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그것이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의 자산’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한국형 필란트로피를 논할 때 핵심은 ‘개인재단 설립을 장려하자’는 구호가 아니라, 개인 필란트로피가 사회로부터 환대받고 지속될 수 있는 제도와 문화의 조건을 동시에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단을 설립해 자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행위가 비교적 자연스러운 선택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제도적 장치가 받쳐 준다는 점도 크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화적 해석입니다. 이름을 걸고 공공 문제에 개입하는 일이 ‘과시’나 ‘명예욕’으로만 읽히지 않고, 공적 책임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문법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 문법이 있을 때 필란트로피는 특별한 결단이 아니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경로가 됩니다.
반면 한국에서 개인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기부와 재단 설립은 여전히 불편한 시선을 동반합니다. 자산가에 대한 구조적 불신, 공공선의 사유화에 대한 경계, ‘조용한 기부’가 미덕이라는 정서가 겹치며 개인재단은 쉽게 환대받기보다 먼저 검증의 대상이 됩니다. 과거 고(故) 강태원 회장의 기부로 설립된 KBS 강태원복지재단을 둘러싼 논쟁은 이 불편함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경계심에는 현실의 근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기업이나 기업가가 재단을 통해 공공성을 사유화하거나, 기부를 브랜드 구축과 이미지 관리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는 의심을 사는 사례가 반복돼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미국도 예외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카네기, 록펠러, 포드 역시 처음부터 ‘필란트로피스트’로 환대받지 못했고, 재단 설립 초기에 ‘이미지 세탁’ 논란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며 인식이 바뀐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돈을 ‘많이’ 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교육·보건·연구·공공 인프라 같은 시스템 영역에 장기적으로 개입하며 사회 구조를 바꾸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기부의 정당성은 규모가 아니라, 지속성과 구조적 성과를 통해 뒤늦게 증명되곤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개인 필란트로피가 확장되려면, ‘공익 장치의 구조’가 먼저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재단이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고 어떤 권력 구조를 만들며, 시간이 지나도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계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신뢰 자본을 이미 축적한 대기업 가문과 성공한 기업가 집단이 일정한 모델을 먼저 만들어 가는 방식이 현실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개인 단위의 기부가 존재해 왔지만, 개인재단 중심 전통이 사회적 문법으로 굳어지는 데에는 상징적 레거시 재단의 등장과 장기적 성과가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빌 게이츠가 비교적 ‘필란트로피스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기부액 규모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자신의 부를 만든 산업과 이해관계가 직접 닿는 영역이 아니라 국제 보건, 교육, 빈곤, 식량안보 같은 공공 의제에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필란트로피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로 읽히며 신뢰를 만들었습니다.
록펠러, 포드, 카네기 재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이 사회적 신뢰를 얻게 된 이유는 막대한 기부금 때문이 아니라, 교육·연구·공중보건·민주주의·인권·지식 인프라와 같은 공공 시스템 영역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며 자본을 사적 축적의 도구가 아닌 사회 구조를 설계하는 자원으로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산업 자본가 가문이 ‘착취자’에서 ‘공공 시스템 구축자’로 인식이 전환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제약회사 설립자가 재단을 만들어 아무리 희귀병 백신 개발에 거액을 기부하더라도, 그 구조가 시장 논리에 같혀 있는 한 대중은 기부의 순수성을 쉽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업과 무관한 분야에 기부하면 곧 공공성이 보장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선이 시장 논리와 결합될 때 공공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논쟁은 게이츠 재단의 백신 사업을 둘러싼 비판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2002년 월스트리트저널은 빌게이츠재단이 백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초기 연구 비용을 지원했지만, 지식재산권과 유통권은 대형 제약회사들이 가져가도록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게이츠 재단의 백신 산업을 둘러싼 논쟁을 보여주듯, 자선이 시장 논리와 결합되는 순간 공공성은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필란트로피의 본질적 질문은 단순합니다. 어디에, 얼마나 기부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를 만들었는가입니다. 선한 의도도, 거대한 기부금도 공공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기부가 만들어 내는 권력 구조와 의존 구조, 그리고 시스템 설계가 신뢰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한국형 필란트로피 논의에서 “미국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자”는 결론은 위험합니다. 특히 2026년의 미국은 정치·사회적 갈등과 제도 균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어, 더 이상 ‘선진 모델’이라는 한 단어로 단순 호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배울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성과의 화려함이 아니라, 필란트로피를 떠받치는 ‘법과 구조’입니다.
필자가 지난 10여 년간 미국과 한국의 비영리 섹터를 비교하며 반복 확인한 가장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는 ‘기부와 비영리·시민단체를 둘러싼 법제의 설계 방식’입니다. 미국은 기부와 재단을 포함한 비영리 조직 규율을 세제법(Revenue Act of 1969)을 축으로 비교적 통합된 단일 구조(unified system) 안에 묶어 두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기부 세제와 비영리 관련 법체계는 분절적이고 복잡합니다. 사회적 요구가 생길 때마다 제도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누적돼 온 탓에, 개인 기부자에게도 비영리 운영 주체에게도 ‘예측 가능하고 매력적인 제도’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다트머스 판결과 지라드 유언 판결이 상징하듯, 미국은 비영리의 독립과 기부자의 권리를 둘러싼 규범을 판례로 축적하며 다양한 조직 유형과 기부 행위, 공공성 실천을 하나의 규범 체계로 구조화해 왔습니다. 한국이 이제 고민해야 할 방향도 여기에 가깝습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제도를 보완하는 접근을 넘어, 기부·재단·비영리·시민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통합적 법제(unified legal framework)’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선행돼야 합니다. 필란트로피는 문화나 선의만으로 커지지 않습니다. 제도와 규칙이 먼저 길을 내고, 그 위에서 신뢰가 쌓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우선순위는 ‘개인재단을 늘리자’가 아니라, 기부와 공익 활동이 장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바닥을 까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바닥 위에서 재단은 목적을 더 명확히 하고, 활동은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게이츠 재단이 보건·빈곤 같은 특정 영역에 집중해 온 것은 역량의 한계라기보다 설계의 결과로 읽힙니다. 록펠러와 카네기가 모든 사회문제를 끌어안기보다 자신들의 전략 분야에 장기 투자해 온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한국형 필란트로피의 출발점은 ‘이름’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창립자가 떠난 뒤에도 작동하는 지배구조, 시장 논리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을 꾸준히 떠받칠 재원·권한·운영의 설계가 갖춰질 때, 필란트로피는 비로소 사회의 신뢰 자산이 될 것입니다.
김성주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
필자 소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사회복지학과 및 행정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며, 비영리조직, 시민사회, 자선·기부, 사회적 형평성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학문 및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비영리 경영(Nonprofit management), 비영리 교육과 필란트로피(Philanthropy studies)에 관한 국제 비교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연구와 교육뿐 아니라, 학문적 지식을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비영리 조직의 역량 강화, 시민사회 생태계의 발전, 그리고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모색하는 데 지속적으로 힘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