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경험 이후의 삶, 벨기에의 ‘회복 사다리’

이주연 안양시만안종합사회복지관 과장 

한국은 빠른 속도로 암 생존율이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생애 동안 암을 경험하고, 치료 이후 5년 생존율은 70%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 수치가 곧 ‘삶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치료가 끝난 뒤 찾아오는 정서적 고립, 관계의 단절, 소득 상실, 직장 복귀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제도는 치료의 순간까지만 작동한다. 완치를 판정받는 순간, 환자는 의료 체계의 보호 범위를 벗어나고 이후의 시간은 개인의 문제로 밀려난다. 회복 이후의 삶을 어떻게 다시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답이 충분히 준비돼 있지 않다.

이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난해 9월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인웍스(INWORKS)’는 벨기에 관련 기관들을 찾았다. 이들이 만난 현장에서는 치료 이후의 시간을 단절된 사후 관리가 아니라, 정서 회복에서 사회 복귀와 고용 회복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설계하고 있었다.

◇ 회복은 ‘관계’에서 시작된다

암 경험자의 정서적·사회적 회복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 에리카 티즈 하우스(Huis Erika Thijs, 이하 HET)는 암 투병 중이거나 암을 경험한 사람과 그 가족이 의료 환경을 벗어난 일상 공간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설립됐다.

이 기관의 설립자인 에리카 아놀디네 코르넬리아 티즈(Erika Arnoldine Cornelia Thijs)는 자신의 암 경험을 통해 단순한 생존을 넘어 삶의 질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환자와 가족이 함께 머물며 질병과 삶을 받아들이는 치유의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탄생한 곳이 HET다.

운영 방식은 다소 독특하다. 코디네이터 1인을 제외한 약 45명의 인력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주로 은퇴 연금 수급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전문 인력 중심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지닌 시민이 운영의 주체가 되는 구조다. 이 관계 기반 지원은 암 경험자를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구성하는 ‘주체’로 전환하는 출발점이 된다.

지난해 9월 ‘인웍스(INWORKS)’팀이 벨기에 비영리기관 에리카 티즈 하우스(Huis Erika Thijs)에서 암경험자가 만든 예술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이주연 안양시만안종합복지관 과장

모자이크 제작, 도자기, 뜨개 인형 만들기 등 예술 기반 프로그램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참여자들은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고, 완성된 작품은 지역 전시로 이어진다. 정서적 치유가 의료의 부속 기능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으로 인식되는 방식이다.

HET의 프로그램은 철저히 이용자 수요에 기반해 설계된다. 방문자와 자원봉사자에게 직접 질문해 필요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조정한다. 방문자의 약 70%가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해 카드게임이나 무알코올 이브닝 파티 등 남성 참여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는 점은, 이 기관의 운영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완치 이후의 삶, 사회는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겐트 대학병원 암센터(Kankercentrum UZ Gent)는 치료와 사회 복귀 사이의 공백을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진단 초기부터 노동심리학자가 환자와 만나 직장 복귀 가능성을 함께 검토한다. 치료 일정과 병행해 병가 계획과 복귀 시점, 업무 조정이 논의되고, 직장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상황을 알릴지에 대한 문제 역시 병원이 중재한다.

‘인웍스(INWORKS)’팀이 벨기에 겐트 대학병원 암센터(Kankercentrum UZ Gent)의 환자를 위한 휴식 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이주연 안양시만안종합복지관 과장

이는 치료 이후의 시간을 단일 기관의 책임으로 보지 않는 인식에 기반한다. 병원 관계자는 “치료 이후의 시간은 의료, 복지, 고용 등 다양한 주체가 역할을 분담하고 연결될 때에야 비로소 안정적인 사회 복귀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병원 내부의 진료과, 재활, 심리상담, 사회복지 부서는 물론, 외부의 지역병원·복지기관·고용서비스·기업·지방정부 등 80여 개 기관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었다.

벨기에의 GTB(Gespecialiseerd Team Bemiddeling·전문 중재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모습. /GTB

벨기에에서는 질병 이후의 노동 복귀를 개인의 결단이나 책임으로만 보지 않는다. 중증질병 경험자와 장애인의 직장 복귀를 지원하는 GTB(Gespecialiseerd Team Bemiddeling·전문 중재팀)의 ‘브릿지빌더(Bridge Builder)’는 병원을 직접 찾아 초기 상담을 진행하고, 고용주와 함께 복귀 시점과 근무 형태, 업무 조정 방안을 설계한다. 단순한 취업 알선이 아니라, 치료 이후의 경로를 사회가 함께 조정하고 책임지는 방식이다.

사회적 소외 계층의 노동시장 재진입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 에미노(Emino)는 암 경험자를 위한 ‘렌트리 프로그램(Rentree Program)’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암 경험자의 직장 복귀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의료·심리·노동·고용주를 함께 연결하는 구조를 갖는다.

‘인웍스(INWORKS)’팀이 암 경험자의 직장 재통합을 지원하는 렌트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에미노(Emino) 관계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주연 안양시만안종합복지관 과장

렌트리 프로그램은 렌트리 코치(Rentree Coach)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렌트리 코치는 의료, 심리, 노동법, 커뮤니케이션을 아우르는 전문 인력으로, 초기 상담부터 직장 복귀 이후의 적응 단계까지 암 경험자와 1대1로 동행한다. 파트타임 복귀나 단계적 복직, 업무 전환 등 현실적인 조정안은 고용주와 협의해 마련하며, 복귀 이후에도 재상담을 통해 상황 변화에 맞는 계획을 지속적으로 조정한다.

벨기에에서 만난 기관들은 치료 이후의 시간이 한 사람에게 여러 과제가 동시에 찾아오는 과정임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서적 회복과 관계 회복, 직장 복귀는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었고, 이를 지탱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 사회도 이제 질문을 바꿀 시점에 와 있다. 치료 성과를 어디까지 성취했는지가 아니라, 치료 이후의 삶을 사회가 어디까지 함께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벨기에의 사례는 회복이 개인의 몫으로 남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주연 안양시만안종합사회복지관 과장

필자 소개

안양시만안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역 기반 복지사업을 기획·운영하며 주민의 삶의 안정성과 사회적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지역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하고 실효성 있는 개입을 모색하는 실무자로서, 지속 가능한 지역복지 모델 구축을 위해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고 있다.
※ 본 기고문 시리즈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사회혁신가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수강생들이 해외 선진기관 탐방에서 얻은 통찰과 우리나라 소셜섹터로의 시사점을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본 기고문은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14기 수강생이 각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을 대표해 작성한 것으로, 아산나눔재단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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