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비영리] 우리의 정교함이 현장의 다정함을 압도하고 있지 않는가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2025년 한 해 동안 나는 유난히 많은 현장을 오갔다. 비영리를 둘러싼 여러 포럼과 학회, 일본에서 열린 국제 논의의 자리, 그리고 청소년부모와 청년, 활동가들과 마주 앉은 아름다운재단 안팎의 수많은 행사장에서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 형식은 달랐지만 현장의 공기는 닮아 있었다. 모두가 무언가를 더 잘 해내고자 애쓰고 있었고 동시에 이 속도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결과공유회 자리에서 협력기관의 실무자들은 제도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일상의 균형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기도 했다. 사업의 심사 현장에서는 하나의 사업을 기획하고 승인받기까지 쌓여온 수많은 조정과 설득의 시간이 떠올랐다. 현장 단체들과의 만남에서는 사업보다 사람이 먼저 소진되는 구조에 대한 조용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활동가들은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복잡한 행정과 지표의 압박 속에서도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그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계속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묻고 있었다.

2025년의 현장은 변화에 둔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 변화의 속도와 현장의 언어 사이에는 분명한 시차가 존재했다. 나는 여러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들었다. 이 시차의 간극 속에서 정책과 제도는 과연 현장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온기로 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2026년을 앞둔 지금 더욱 선명해진다. 정부는 사회연대경제를 중요한 정책 축으로 제시하며 재정 지원과 제도적 기반 확충을 예고했다. 통합돌봄의 본격 시행 역시 공공과 민간, 비영리의 역할 재편을 요구한다. 구조적으로 보면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기대만큼이나 혼선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사회연대경제 정책은 방향은 분명하지만 기존 비영리와 사회적경제 조직의 역할 구분, 재정 흐름, 행정 책임의 경계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통합돌봄 역시 체계 전환의 취지에는 공감하고 환영하지만 충분히 정리된 설계 없이 과제만 현장으로 내려올 경우 그 무게는 고스란히 현장 활동가의 헌신 위에 얹힐 가능성도 있다. 제도는 앞서가지만 이를 감당해야 하는 조직과 사람의 마음이 준비되는 속도는 다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기업과 사회적경제 조직, 비영리기관들은 공통의 요구 앞에 서 있다. 임팩트 측정과 ESG 고도화, 지속가능성 증명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 되었고 수치와 지표의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다.

그러나 2025년의 현장이 동시에 말해준 것도 분명하다. 정교한 지표가 현장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현장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임팩트는 결과를 한눈에 보여주지만 그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지속가능성은 복잡한 모델 이전에 사람이 지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단순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많은 변화를 너무 빠르게 통과하고 있다. 기술은 가속화되고 사회적가치를 둘러싼 언어는 점점 더 정교해진다. 더 나아진, 더 고도화된 사회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과정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혹시 너무 많은 기준을 세우느라 정작 현장이 지켜온 다정함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측정과 증명, 전략과 구조는 분명 중요해졌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결국 향해야 할 곳은 다시 사람이다. 답은 거창하지 않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내 옆에 선 사람에게 내밀 수 있는 따스한 손길로 이어져야 한다.

기술과 정책이 고도화될 수록, 가치를 추구하는 많은 주체들이 등장할수록, 화려한 수식어들이 우리의 가치를 대변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은 아름다운재단의 제1호 기금출연자인 김군자 할머니의 한마디다.

“이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고도화된 정책과 정교한 지표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결국 사람이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2026년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을 다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필자 소개

아름다운재단에서 15년간 근속하고 2023년 내부선발 1호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건강한 기부문화를 확산하는 아름다운재단의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전략적 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난제’가 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다자간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거버넌스에 대한 연구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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