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은 시작일 뿐, ‘시스템’을 남겨야 지속된다” [AVPN 2025]

[인터뷰] 카바사와 이치로(Kabasawa Ichiro) 일본재단 전무(Executive Director)

“교육부는 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재단은 기업, 교육부와 함께 온라인 대학 설립에 나섰습니다. 첫해 4000명 이상이 등록했고, 앞으로 5년은 재단이 지원하지만 이후에는 기업이 재정을 맡아 운영합니다.”

지난 4월, 일본 최초의 온라인 대학 ‘ZEN 대학’이 문을 열었다. 배경에는 심각한 사회문제 ‘부등교(不登校·등교거부)’가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 따르면 2023년 초·중학교에서 30일 이상 결석한 학생은 34만6000여 명. IT기업 도완고(Dwango)와 모회사인 일본의 대형 미디어 그룹 ‘카도카와(KADOKAWA)’가 온라인 고등학교를 세운 데 이어, 일본 재단이 대학 설립까지 나선 이유다.

◇ “혼합금융, 시스템을 바꾸는 힘”

지난달 9일 홍콩에서 열린 ‘AVPN 글로벌 컨퍼런스’에서 <더나은미래>와 만난 카바사와 이치로(Kabasawa Ichiro) 일본재단 전무는 이를 ‘혼합금융(Blended Finance)’ 사례로 설명했다.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시스템을 바꾸는 혼합금융이 필요합니다.”

지난달 9일 홍콩에서 열린 AVPN 글로벌 컨퍼런스에서 <더나은미래>와 인터뷰한 카바사와 이치로(Kabasawa Ichiro) 일본재단 전무의 모습. /김규리 기자

2017년 재단에 합류해 국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카바사와 전무는 NHK 기자로 20년 넘게 일하며 이라크전·아프간전을 취재했던 인물이다. “기자는 문제를 찾아내 보도할 뿐 해결은 남의 몫이었죠. 지금은 재단에서 돈이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게 제 책임입니다.”

1962년 설립된 일본재단은 일본의 민간 자선재단으로, 해양 정책, 장애 포용, 교육, 고령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지난해 기준 재단의 사업비 지출은 1050억엔(한화 약 1조원), 순자산은 3408억엔(한화 약 3조2450억원)에 이른다. 카바사와 전무는 “단기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 문제 해결 시스템 구축이 우선순위”라고 강조했다.

그가 꼽은 시스템 구축의 핵심은 ‘협력’이다. “정부·기업·비영리 등의 다양한 조직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혼합금융’이다. 그는 “자선단체가 처음 위험을 감수하는 모델”이라며 “단순 기부를 넘어 정부·기업·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카바사와 전무가 말하는 사회 문제 해결의 방식은 분명하다.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뒤, 현지 정부나 파트너가 이어받아 확산하도록 하는 것”. 단순한 재정 투입이 아니라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현지화하는 접근이다.

◇ 시스템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전략은?

대표 사례는 라오스 ‘청각장애 아동 교육 프로젝트’다. 라오스에는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는 있었지만, 중학교 졸업생조차 없었다. 고등·대학으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카바사와 전무는 “정부가 이 교육 모델을 제도 안에 편입해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처음부터 ‘출구 전략(Exit Plan)’을 세웠다”고 말했다.

먼저, 일본재단은 라오스 정부와 MOU를 맺고 학교를 세워 10년간 운영했다. 그 결과 첫 고등학교 졸업생이 배출됐고, 4년 뒤에는 첫 대학 졸업자가 교사로 돌아와 교육의 선순환을 이끌 예정이다. 그는 “시스템 구축에는 약 10년이 걸리고, 우리의 자본도 그 정도까지만 지속된다”며 “재단의 역할은 모델을 시작하고, 이후에는 현지 정부가 제도 안에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바사와 이치로(Kabasawa Ichiro) 일본재단 전무가 지난달 9일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서 답변하고 있다. /홍콩=김규리 기자

재단이 만든 시스템을 이어가려면 이를 책임질 현지 파트너와의 협력이 필수다. 카바사와 전무는 동시에 “정치적 변수로 인해 프로젝트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한계로 꼽았다. 그는 “베트남에서는 대학과 함께 20년간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수어 교육 시스템을 운영했지만, 정권 교체와 대학 내부 사정으로 결국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위험은 비영리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간 기업도 마찬가지로 겪는 일”이라며 “문화 차이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장애물은 아니며, 중요한 건 현지 문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국가별 협력 방식의 차이도 짚었다. “베트남처럼 정부 역량이 강한 곳은 정부와 협력하는 게 효과적이지만, 정부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한 필리핀에서는 민간의 대학과 손잡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일본재단은 한국과도 오랜 협력 관계를 이어왔다. 1995년 서울에 ‘아시아연구기금’을 설립했고, 지난해에는 ‘ARF 코리아 미래비전포럼’을 열었다. 카바사와 전무는 “학자들과의 교류와 연구는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는 학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반 청년들까지 참여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일 청년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양국에는 역사적 과제도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며 “미래를 이어갈 젊은 세대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재단의 미래 전략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에 얽매이기보다 앞으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속 발굴하고 실행할 것입니다.”

홍콩=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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