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화)

“밤낮으로 이주민 의료 통역… 우리도 ‘도움줄 수 있는’ 사람”

 [우리사회 利주민] 테스 마낭안 링크 이사장

한국살이 28년 차 결혼 이주민
아시아 이주민들 모여 통번역 제공
의료 제도 설명해주고 병원도 동행

이주민의 간절함 알기 때문에 봉사
그들도 똑똑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

지난 7일 만난 테스 마낭안 링크 이사장은 “다른 나라엔 이주민 출신 의사, 변호사도 많은데 우리나라에선 이주민 대부분이 농장이나 공장에서 허드렛일만 하고 있다”며 “능력을 펼쳐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이주민에게 기회를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부산=류열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테스 마낭안(51) 링크이주민통번역협동조합(링크) 이사장은 올해로 한국 생활 28년 차를 맞은 결혼 이주민이다. 필리핀 출신인 그는 “스물네 살에 한국에 왔으니 이제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다”며 웃었다. 그는 부산·경남 지역 이주민 사회의 ‘왕언니’로 통한다. 문제만 생기면 ‘테스 언니’부터 찾을 정도다.

“사실 저는 나서는 것도 싫고 이사장 자리도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은 많고 도울 사람은 적으니 쉴 수가 없죠. 어려운 이주민이 계속 찾아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어요. 그렇게 주고받으면서 산 게 벌써 20년이 됐네요.”

지난 2016년 태국·네팔·베트남 등 아시아 10여 국 이주민이 만든 통번역협동조합 ‘링크’가 출범했고, 조합원들은 당연한 듯 그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지난 7일 부산 전포동 링크 사무실에서 테스 이사장을 만났다.

“한국을 사랑하지만 필리핀도 여전히 사랑해요”

테스 이사장은 “스무 살이 넘도록 나 자신이 한국에서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1992년 대학생이었던 테스는 어학 연수차 필리핀을 찾은 현재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듬해 학교도 그만두고 문화도 언어도 낯선 한국에 왔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국 필리핀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혼인신고 후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 필리핀이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아서 국적을 버려야 했는데 그때가 가장 슬펐다”고 했다.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도 필리핀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다. 그의 주민등록증에는 ‘산타 테레시타 벨라데 마낭안’이라는 열두 글자 필리핀 이름이 두 줄로 빼곡히 적혀 있다. “한국을 사랑하면서 필리핀도 사랑할 수 있는 거죠. 모든 걸 한국식으로 해야 한국인인 건 아니잖아요?”

낯선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흔한 다문화센터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말도 빨리 늘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필리핀에선 부부가 집안일을 함께 해요. 가정의 주도권도 여자 쪽에 있죠.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거예요. 결혼 초기엔 그 문제로 남편과 많이 싸웠어요(웃음).”

억센 부산 사투리를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우고 한국 가족과의 문화 차이를 좁혀가며 살아온 그녀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가족이 있어 한국에 적응할 수 있었다”며 “이주민 중에는 버팀목이 돼줄 가족 하나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십 년 넘도록 돈 한 푼 받지 않고 누군가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이유다.

“한국 사회가 이주민의 가능성을 바라봐 주길”

테스 이사장이 주로 하는 일은 의료 통역이다. 그는 “이주 노동자나 결혼 이주민들이 병원 가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건강보험료를 매달 내면서도 제도에 대해 잘 몰라서 ‘병원비 폭탄’을 맞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에 가입해 놓고도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업주나 가족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거든요. 그럴 때 링크가 도와줍니다. 어떤 제도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줘요. 또 의료 관련 의사소통은 정확해야 하니까 한국어가 서툰 분들은 특히 도움이 절실해요. 어떤 질병인지, 추가 치료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돈은 얼마나 드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간단한 질병은 전화 통역으로도 진행한다. 혼자 병원을 찾은 환자가 테스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의료진을 바꿔주면 통역을 해주는 방식이다. 치료 과정에 동행하면서 도와주는 경우도 많다. “가족과 말이 안 통하는 임신한 결혼 이주 여성의 경우 출산 전 과정을 함께하기도 해요. 아예 수술실까지 들어가요. 아이를 필리핀으로 보내야 할 땐 한국 국적이라 출입국이 편한 제가 아이를 필리핀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고요.”

인터뷰 도중에도 계속해서 전화벨이 울렸다. 대부분 병원에서 온 통역 요청 전화였다. 그는 “새벽에도 전화받고 뛰쳐나가는 일이 많다”며 “기댈 곳 없는 이주민이 찾을 사람이 나와 우리 단체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쉬는 날은 토요일 하루뿐이다. 대부분 이주노동자가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에 쉬기 때문에 일요일에 가장 바쁘다. 급여도 없는 자원봉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존중받으며 살고 싶은 이주민들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주민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나 ‘도와줘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 좋겠어요. 링크가 우리 힘으로 돈을 모아서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우리를 ‘똑똑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한국 사회에 각인시키고 싶어요. 이주민을 ‘짐’이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봐 줄 때까지 링크는 계속 갈 겁니다.”

[부산=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