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공변이 사는 法] “홀로 남겨진 발달장애인, ‘사회적 안전망’ 절실…후견인 필요해”

[공변이 사는 法] 배광열 변호사


성년후견 전문가로 2016년 ‘온율’ 합류
피후견인 재산·신상 보호 위해 노력

노인 인구 늘지만 전문 인력 턱없이 부족
“자기결정권 존중하는 것도 후견인 역할”

지난 17일 만난 배광열 변호사는 “후견 제도는 단순히 재산을 보호하는 목적이 아니라 피후견인이 하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 등을 돕는 폭넓은 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며 “특히 취약 계층 대상의 후견 업무는 재산관리보다 신상 보호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많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후견 제도를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가 아직 많습니다. 후견이 고액 자산가의 재산 관리용이라는 선입견 탓에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후견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질 못하고 있어요. 보호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가족도 친족도 없이 혼자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남은 재산은 생존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많고 적음을 떠나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공익사단법인 온율의 배광열(34) 변호사는 성년 후견 전문가다. 그는 보건복지부 발달장애인 공공후견 지원단과 한국치매협회 고령자치매후견센터에서 실무를 쌓고 지난 2016년에 온율에 합류해 후견인이 필요한 발달장애인과 치매 노인의 후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피후견인의 재산·신상 보호…자립 여건 조성하기도

후견인의 역할은 크게 재산 관리와 신상 보호 등 두 가지로 나뉜다. 발달장애인의 보호자가 사망하거나 독거노인이 치매에 걸려 판단 능력을 상실했을 때 이들의 재산과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이 필요하다. 문제는 후견인으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배광열 변호사는 지적장애 2급인 A씨의 후견 업무를 지난해부터 맡고 있다. A씨는 지난 2018년 가족이 뱀파이어라며 살해한 이른바 ‘인천 뱀파이어 사건’ 당사자다. “조현병을 앓던 오빠가 집에서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피후견인 A씨도 죽을 뻔한 사건입니다. 한 부모 가정이었는데 오빠는 구속되고 어머니는 사망한 거죠. 범죄 피해자 구조금 1억원과 상속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인천지검은 구조금을 지급하면서 조건 두 가지를 달았다. 후견임 선임과 신탁계약 체결. 그간 구조금 보호를 위해 검찰에서 후견인 선임을 요구한 적은 있었지만, 은행에 돈을 묶어두는 신탁계약까지 조건을 단 건 처음이었다. “당시 온율과 인천지검, 하나은행이 협조해 A씨 보호를 위한 역할을 하나씩 맡았어요. 은행은 구조금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매달 생활비로 50만원씩 지급하고, 온율은 후견을 맡고요. 만약 의료비나 주거비 마련으로 목돈이 필요할 때는 인천지검이 감독하도록 했죠. A씨의 경우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스스로 돈 관리를 하는 법을 배우면서 서서히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입니다.”

후견제도, 발달장애인·치매 노인에게 필요해

학대 피해를 당한 노인도 후견인이 필요한 주요 대상 중 하나다. “한번은 경증 치매를 앓는 할머니가 아들로부터 학대받는 것 같다는 사례가 접수됐어요. 할머니가 아들을 피해 경찰서에 갈 정도였죠. 명확한 증거는 없었는데 마침 아들이 다른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게 되면서 후견인이 필요해졌어요. 마땅한 적임자가 없던 상황에 당시 5년 정도 곁에 있던 요양보호사가 후견인으로 나섰고 법원에서 받아들였어요. 변호사가 아닌 제3자가 후견인으로 나서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죠.”

보건복지부는 발달장애인과 치매 노인에 대한 공공후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과별로 사업 내용이 통일돼 있지 않고, 후견인으로 나설 인력을 구하는 일도 어려운 실정이다. 또 법원에서 운영하는 국선 후견인 제도 역시 지금까지 약 100건에 불과할 정도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

법원행정처에서 발간한 ‘2019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국내 후견심판 청구 건수는 7200건이다. 2014년 2600건에 비하면 약 3배 증가했지만 해외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수다. 일본은 한 해 4만건이 청구되고, 누적 후견 감독 사건은 21만건에 이른다. 한국후견협회는 국내에 후견인이 필요한 치매 노인과 학대 피해 노인·정신장애인 등을 1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내 만 65세 이상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813만명이다. 배광열 변호사는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데 비해 후견인으로 나설 수 있는 전문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했다.

후견은 최후 수단…후견 필요없는 사회가 바람직해

배광열 변호사는 후견 제도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인식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이 충동적으로 과소비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건강에 나쁜 줄 알면서도 술·담배를 해요. 모든 일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건 아니란 거죠. 그런데 정신장애인이 내리는 결정은 무조건 잘못된 행동으로 보고 강제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견인은 피후견인이 조금 비이성적 판단을 해도 존중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거 같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배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발달장애인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을 억압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도와주는 것도 후견인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비장애인도 의학이나 법학 등 전문 분야를 전혀 모르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면 된다”며 “이들을 보호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인간다운 생활을 한 권리를 보호하는 게 후견 제도 이념에도 부합한다”고 했다.

후견 업무를 처리하느라 매일 시간이 빠듯한 배 변호사지만 후견 제도 활성화에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후견의 기본적 원칙은 ‘보충성’이기 때문에 후견인이 없어도 해결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며 “후견은 마지막 수단으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하고 도움 줄 수 있는 지원은 ‘안정적인 일자리’로 꼽았다. 배 변호사는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는 시간은 직장에서 동료와 함께 있을 때”라며 “직장은 범죄나 각종 사고에 노출될 위험을 줄이고 심리 변화도 감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보험 회사들이 60세가 넘으면 후견 서류를 주고 안내한다고 해요. 노령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우리나라도 후견 제도가 발전하면 좋겠지만 그게 목표가 될 수 없어요. 고령자나 발달장애인도 동등하게 대우받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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