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필란트로피] (上) 기부계 큰손으로 떠오른 팬덤
생일·데뷔일 등 기념일에 ‘특별한 축하’
공동 기금 모으고, 투표로 기부처 결정
가수 강다니엘 팬덤, 3년간 7억원 ‘훌쩍’
팬들 선행에 스타도 기부 동참해 화답
팬덤 기부, 문화로 정착 위한 노력 필요
팬덤(fandom)의 힘은 강한 구매력과 동원력에서 나온다. K팝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조직화된 팬덤이 있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이들이 기부에도 아낌없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면서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기를 살려주자는 취지다.
팬덤의 기부 방식은 독특하다. 생일이나 데뷔일에 맞춰 온라인으로 빠르게 결집하고 적극적으로 기부에 동참한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수천만원을 모을 정도다. 한 아티스트를 지지하는 팬덤도 여럿인 경우가 많아 기부 규모를 집계하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팬들의 한 해 기부 총액을 십억원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익명의 팬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기부 트렌드 ‘팬덤 필란트로피’ 현상을 들여다봤다.
한 달 만에 2억원 모은 폭발적 기부 화력
“이번 생일 서포트는 축하 광고 및 기부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목표액(1000만원)만큼만 진행하고자 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입금 후 반드시 폼을 작성해주세요. 모금액은 강다니엘님의 서포트를 위해 사용됩니다.”
가수 강다니엘의 팬카페에 ‘생일 기념 서포트’ 안내글이 올라왔다. 생일을 한 달 앞둔 지난해 11월이었다. 팬덤은 ‘덕질’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공동 기금을 운영한다. 주로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기부하거나 온·오프라인 생일 축하 광고를 집행하는 데 쓴다. 기부처는 온라인 투표를 통해 한국어린이난치병협회로 결정됐다. 기부액은 1210만원. 강다니엘의 생일인 12월 10일을 상징하는 숫자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시다발로 일어난다. 강다니엘 생일 기부를 기획한 모임은 모두 7곳으로 이들이 기부한 총액은 1억3000만원에 이른다. 팬들의 기부에 강다니엘이 화답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달 24일 청각장애 사회복지단체 사랑의달팽이에 3000만원을 기부했다. 특히 기부자명에 본인이 아닌 팬클럽명인 ‘다니티’를 올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은 또다시 소액 기부 릴레이를 벌였고 단숨에 6500만원이 모였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기부에 동참한 한민지(34·가명)씨는 “평소 기부 선행을 펼치는 강다니엘의 행보에 팬들이 힘을 더 실어주는 것”이라며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이 수억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강다니엘이 데뷔한 2017년 6월 이후 3년간 팬덤이 기부한 총액은 7억4700만원에 달한다.
팬덤 기부는 대개 아티스트와 관련된 기념일에 맞춰 준비된다. 가장 흔한 생일 기념부터 데뷔 기념일, 앨범 발표 1주년, 자작곡 발표 1주년, 팬미팅 투어 기념 등 축하할 일은 차고 넘친다. 아티스트가 미성년자일 경우, 고등학교 졸업 기념에 맞춰 기부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물론 모금이 아닌 개인 팬의 1인 기부도 존재한다. 닉네임 ‘CODE’를 사용하는 한 개인 팬은 지난 2017년 강다니엘의 이름으로 아름다운재단, 국경없는의사회,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세이브더칠드런,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한국소아암재단,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동물권단체 케어 등 단체 10곳에 96만1210원씩 총 961만2100원을 쾌척했다. 또 익명의 트와이스 팬은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지금까지 총 10회에 걸쳐 누적 26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익명 기반에도 투명성 확보… 해마다 규모 확대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팬덤 기부는 익명의 팬들의 손으로 기획되고 집행된다. 신뢰를 담보할 장치는 없지만, 팬카페 운영진의 꾸준한 활동 내용과 체계적 업무 방식은 팬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디시인사이드 강다니엘 갤러리의 경우, ‘기부 모금을 통한 금전적인 지불 협의 외 그 어떤 추가 요청도 진행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담은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 방탄소년단 팬카페 운영진으로 활동 중인 20대 직장인 김민희(가명)씨는 “모금 내용과 집행 과정, 이월금 정리 등 기부 과정을 상세하게 공유하고 있다”며 “특히 기부에 참여한 팬들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기부처에서 발급한 후원증서를 즉시 공유하는 것도 필수”라고 설명했다. 이별님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대외협력팀 대리는 “후원증서에 스타의 사진과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넣을 수 있기 때문에 각 팬덤만의 특별한 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했다.
기부 소식을 공유할 땐 여러 SNS 가운데 유독 ‘트위터’를 고집한다. 김씨는 “‘덕질은 트위터’라는 공식이 예전부터 있었다”며 “트위터는 중국이나 동남아·남미 등 해외 팬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소식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비영리단체들은 최근 몇 년 새 기부 의사를 밝혀오는 아이돌 팬덤이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사랑의달팽이의 경우 지난 2016년 2931만원에 그쳤던 팬덤 기부액이 2017년 4393만원, 2018년 7982만원, 2019년 1억3000만원(잠정 집계)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한 해 후원금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2016년 1.4%, 2017년 2.9%, 2018년 3.9%, 2019년 5.4%(잠정 집계)로 늘고 있다. 사랑의달팽이 측은 “지난해 연예인 직접 기부액과 팬덤이 마련한 금액을 합치면 3억8000만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팬덤 필란트로피 현상이 하나의 기부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한다. 특히 팬덤 기부가 유행처럼 번졌다가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을 주문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팬덤 기부는 규모도 세계적이고 정기성까지 갖춘 유례없는 특별한 사례”라며 “다만 팬덤의 충성심만으로 기부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기부가 어떤 사회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의미 부여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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