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배터리를 다시 쓰는 더 나은 방법

신기용 인라이튼 대표. /박창현 사진작가
신기용 인라이튼 대표. /박창현 사진작가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평균 교체 주기는 약 1년4개월. 그러나 모든 휴대폰 부품이 ‘버려 마땅한 것’은 아니다. 고장이 잦은 본체에 비해 배터리는 2년 이상 사용해도 80%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 해에 6000만개씩 버려지는 휴대폰 배터리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5월, 세계 최대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www.kickstarter.com)’에 등장한 휴대폰 액세서리 ‘BETTER RE’는 이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기종에 상관없이 스마트폰 배터리를 BETTER RE에 끼우기만 하면, 어떤 스마트폰이든 충전할 수 있는 상용 보조배터리가 된다. 가격은 49달러(약 5만5000원). 시중 보조배터리에 비해 결코 저렴하지 않지만, 20일도 되지 않아 목표금액 5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10일 후, BETTER RE의 킥스타터 프로젝트는 한 달 만에 전 세계 41개국, 781명의 지지자(BACKERS)로부터 7만 달러(약 8200만원)를 모으며 성황리에 종료됐다.

BETTER RE를 세상에 내 놓은 회사는 우리나라의 소셜벤처 ‘인라이튼’이다. 신기용(31) 인라이튼 대표는 디자인과 기술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2014년 7월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인라이튼이 처음부터 배터리에 ‘꽂혔던’ 것은 아니다. 신대표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제품은 에너지 빈곤국가의 ‘빛’이 되어줄 태양광 램프였다.

“울산과학기술원에서 제품·서비스·시스템 융합디자인을 공부하다가 태양광램프를 만들었어요. 전기가 없는 빈민지역에서 사용하는 등유램프는 화재를 일으키기도 하고, 연료비가 계속 나가서 가계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저희가 개발한 태양광램프는 모듈(module)을 필요한 만큼 연결해서 사용하는 방식이라 제작비도 기존보다 적고 사용자 입장에서도 효율적이었죠. 2013년 ‘소셜벤처경연대회’에서 글로벌 최우수상을 받고, 투자사인 ‘크레비스파트너스’를 만나 회사도 세웠어요. 하지만 태양광램프가 대부분 빈곤지역에 무상으로 후원되는 구조다보니 한계가 느껴졌어요. (그냥 후원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비즈니스가 돼야 사회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겠다 싶어 착안한 게 BETTER RE였죠. 램프를 만들 때 제일 비싼 부품이 배터리였는데, 누가 ‘버려지는 휴대폰 배터리는 대부분 다시 쓸 수 있다’는 얘길 해줬거든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걸 다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디어를 막상 제품으로 만들자니 고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제품까지 다 만들어 놓고 디자인을 갈아엎은 것만 세 차례다. 6개월의 시행착오 끝에 지난해 2월, BETTER RE를 완성한 신대표는 본격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에 돌입했다. 미국 사이트인 킥스타터에 프로젝트를 개설하기 위해 현지에 법인을 내고, 구글 검색으로 담당 취재기자들의 이메일을 찾아 소식을 뿌렸다. 제품 브랜딩, 홍보 사진과 영상 기획도 모두 직접 해냈다. 신 대표가 이처럼 고된 과정을 지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제품의 가치를 알아봐 준 지지자(BACKERS)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조배터리 치고 저렴한 가격은 아니죠. 충전량이 높고 더 싼 제품이 시중에 이미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가만있어도, 많은 분들이 ‘이 제품은 그런 제품과 다르다’고 해주시더라고요. 킥스타터 프로젝트 리워드 중 하나로 제품 각인 서비스를 했었는데 ‘for the green planet(푸른 지구를 위해)’, ‘Good to earth(지구에 좋은 일)’.처럼 환경적인 메시지를 요청한 분들도 많았어요. 이것 때문에 우리 제품을 샀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죠. 인라이튼이 원하던 타깃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거든요.”

킥스타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인라이튼은 현재 삼성전자와 함께 저렴한 BETTER RE 보급형 모델을 개발 중이다. 2015년, 중소기업들의 아이디어·신제품 지원 공모전인 ‘삼성 위노베이션 공모전’에서 대중평가단 최다득표를 하며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내년 초에 정식으로 제품이 출시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BETTER RE를 시중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배터리 교체로 가전 살리는 ‘배터리뉴’ 서비스 출시, 성수동의 ‘리빙랩’까지!

킥스타터를 통해 제작한 BETTER RE의 배송이 마무리될 때쯤, 인라이튼은 배터리를 활용해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하나 더 발견했다. 배터리의 수명이 짧아 버려지는 무선 가전제품들이다. 유엔대학(UNU)에 따르면 전자제품 폐기는 매년 200만t씩 늘어나는 반면, 재활용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땅 속에 묻히는 양만 우리 돈 55조원에 달한다.

“교체주기가 짧은 휴대폰은 쓸 수 있는 배터리가 버려져서 문제인데 무선청소기·로봇청소기·노트북·전동공구·전기자전거처럼 교체주기가 긴 제품들은 내장 배터리가 빨리 닳아서 문제예요. 본품에 이상이 없어도 기능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요. 고쳐 쓰는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낫다 싶어 버려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배터리만 좋은 걸로 교체하면 버릴 제품도 ‘다시 살릴 수(renew)’ 있겠더라고요. 지난 5월 ‘배터리뉴(BETTER REnew)’ 서비스를 론칭한 이유입니다.”

배터리뉴는 홈페이지(http://betterre.co.kr) 예약 후, 구식 무선 가전제품을 인라이튼의 생활연구실인 ‘리빙랩’으로 보내면 배터리를 교체해주는 서비스다. 고객 신뢰를 높이기 위해 배터리 교체 과정을 블로그(http://blog.naver.com/better_re)에 공개하고, 베이킹소다·구연산 등 천연 세제를 이용한 가전제품 클리닝 서비스도 제공한다. 현재까지 배터리뉴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은 2000명 이상, 일주일에 100개 이상의 무선가전이 이 서비스를 통해 제 기능을 찾고 있다.

배터리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은 단지 ‘환경’ 뿐만이 아니다. 성수동에 위치한 리빙랩은 전파상이 사라진 동네의 ‘사랑방’이자, 기술 혁신의 현장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창현_인라이튼_리빙랩
인라이튼의 리빙랩에서 배터리를 교체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 /박창현 사진작가

“리빙랩은 겉으로 보면 일반 주택이랑 다르지 않아요. 지난 7월에 혼자 사시던 할머니가 내놓은 집을 개조했거든요.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동네어르신들이 ‘여긴 뭐하는 데야?’ 하면서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구경하다 가시죠(웃음). 요즘은 고장 난 제품이나 안 쓰는 가전제품을 갖고 오기도 하세요. 동네 사람들끼리 마당에 열린 대추를 나눠 먹기도 하고요. 얼마 전엔 폐지 줍는 할머니께서 버려진 무선청소기를 가져다 주셨는데, 평소 저희 먹을 것도 챙겨주시고 감사해서 깨끗하게 제품을 되살려 선물해 드리기도 했어요.”

근처 공업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리빙랩은 그야말로 ‘산 교실’이다. 용산, 종로 등지에서 가전제품 수리로 잔뼈가 굵은 장인들이 리빙랩에 초빙돼 배터리 교체와 수리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리빙랩에 정식으로 채용된 학생은 제품 점검과 배송준비, 장인들의 수리·배터리교체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전제로 한 지금의 산업 구조는 소비자가 제품을 자주 바꿔야 이익을 볼 수 있어요. 그렇다 보니 제품 디자인도 내구성보다는 외양에만 집중되죠. 정말 좋은 디자인은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라이튼은 BETTER RE와 배터리뉴 서비스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 순환 경제 구조를 만들어가는 회사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신대표는 “좋은 제품과 서비스는 그 자체로 혁신과 변화를 품고 있다”고 말했다. 성수동의 소셜벤처 인라이튼이 더 나은 세상을 환하게 밝히길 기대해본다.

정서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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