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영웅을 찾아서] (4) 청소년폭력예방재단 김종기 명예이사장학교폭력으로 자살한 아들 위해 시작,
청소년보호법·학교폭력예방법 제정 힘써
1년에 걸려오는 상담 전화만 8000건…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이유
피해 학생에 아들 이름 딴 장학금 지원
“폭력 없는 초등학교 운영해 보고 싶어”
“1995년 6월 8일 새벽, 출장 중 무심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대현이가 죽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올해 20주년을 맞는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의 설립 배경을 묻는 질문에 김종기(68) 명예이사장은 시계태엽을 뒤로 감듯 천천히 날짜를 되짚었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 2001년 전국 39개교 대상 학교폭력 실태조사, 2004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정…. 그가 설립한 청예단은 지난 20년간 쉴 새 없이 학교폭력과 싸워왔다. 정부의 무관심, 교육 현장의 외면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그의 두 어깨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거쳐 신원그룹 기조실장까지 그야말로 성공한 샐러리맨이었다. 어떻게 학교폭력 문제에 뛰어들게 됐나.
“대현이가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방 창문으로 몸을 던진 그때, 나는 중국 출장 중이었다. 대현이의 죽음 후 아내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가족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대현이 방의 모든 물건 태우고, 속초 앞바다에 가서 아들의 유골을 뿌렸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대현이를 괴롭히던 다섯 명이 친구 두 명을 또 때렸다는 이야기를 딸아이한테 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소송을 준비했다. 피해 학생 부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제발 대현이 아빠 혼자 하세요. 우린 조용히 살고 싶어요’였다. 학교는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다. 학교폭력이 있음을 알리고 아이들을 지키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시민의 모임’을 결성했다. 청예단의 전신이다.”
―정작 재단 이름에는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없다.
“당시에는 ‘학원폭력’ ‘학교주변폭력’ ‘학교 밖 폭력’이라는 말을 썼다. 학교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시대였다. 1995년 11월 1일을 재단법인 출범식으로 잡고 설립 허가를 신청했지만 ‘학교폭력예방재단’은 몇 번이나 반려됐다.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을 찾아간 내게 탈세니 배후 권력이니 하는 의혹이 날아들었다. 한참 실랑이 끝에 ‘학교폭력만 빼면 될 수도 있는데’라고 하더라. 결국 그 자리에서 볼펜으로 ‘학교’ 위에 두 줄을 그었다. 학교폭력을 알리고자 만든 단체가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던 이유다.”
―가시밭길의 시작으로 들린다.
“현장을 발로 뛰었다. ‘학교폭력 예방과 지도’ 책자 2만권을 전국 학교에 무료 배포했고, 기업의 후원을 받아 청소년보호대상도 만들었다. 2001년에는 전국 39개 학교에서 실태조사도 진행했다. 2007년부터는 교육부와 손잡고 학교폭력SOS지원단 사업도 시작했다. 학교폭력 관련 정책을 만들거나 새 기관을 설립할 때 민간 대표로도 많이 참석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은 그다지 일관성 있는 편이 아니었다. 1997년 개설된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원래 문화체육부 소속이었는데 곧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변경됐다. 지금은 여성가족부에 있다. 일관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철학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 마치 핑퐁처럼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 셈이다. 담당자 보직 변경도 부지기수였다. 임기 동안만 적당히 하려는 생각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약하고 전문성은 떨어졌다. 오죽하면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이번에는 제발 가지 말라’고 말했을 정도다.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며 대통령이 왔다가도, 고위 관계자가 다녀가도 바뀌는 건 없었다. 공염불을 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청예단 활동 중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무엇이었나.
“청예단이 47만명의 시민 서명으로 마중물을 부은 ‘학교폭력 예방법’이다. 정부가 학교에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첫 성문법으로 의미가 크다. 당시 최병갑 교육부 학교정책과 교육연구사와 나는 이 법의 주무처가 교육부가 되는 데 힘을 쏟았다. 학교 현장이 폭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전·현직 경찰을 배치하는 ‘스쿨폴리스(School Police)’ 제도, 가해 학생 생활기록부 기재 등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생긴 후에는 청예단으로 걸려오는 상담 전화의 비율이 부쩍 달라졌다. 이전에 피해 학생 측이 100%였다면 이제는 가해 학생 측 25%, 교직원과 경찰도 15%가량 된다. 학교와 경찰은 학교폭력에 관심을 갖고, 가해 학생도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를 만났을 텐데,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는지 궁금하다.
“성폭행을 당해 자살 시도만 세 번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이를 데려다 5개월간 상담 치료를 진행했다. 지금 그 아이는 어엿한 성인이 돼 웹 설계사로 근무 중이다. ‘그대로 딸을 잃는 줄로만 알았다’던 아이 아버지는 지금도 자주 청예단에 들러 봉사하고 있다. 아들과 이름이 같은 아이도 두 명 있었다. 둘 다 보육원 출신으로 하나는 경북 영주에서, 다른 하나는 인천에서 자랐다. 영주 대현이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 야간 업소로 연주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해 같이 만나면 빵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먹었다.’일이 위험하니 그만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인천에 있는 아이는 우리 아들이랑 이미지가 비슷했다. 어린이날에 책이랑 선물을 몇 가지 보냈더니 어버이날에 편지를 보내왔다.”
―대현장학금은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학교폭력 직·간접적 피해 학생 중 자립심이 강하거나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대현이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가줬으면 했다.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만나 직접 장학금을 주는 걸 원칙으로 세웠다. 한 명 한 명 눈빛을 보고 ‘힘들게 마련했으니 귀하게 써달라’고 당부한다. 같이 자장면도 먹고 미술관, 놀이공원도 간다. 이렇게 키워낸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대현장학금 후배들과 이어준다.”
―청예단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텐데.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나. 나는 지금도 힘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못난 아버지로서 나만 편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다. 또 아직 청예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학년이 바뀌는 3월이 되면 상담 전화가 하루에 100통 가까이 걸려온다. 교실의 판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학교 옮겨달라’는 목소리가 쇄도한다. 방학 때는 잠깐 조용하다가 신학기인 9월이면 또 꿈틀한다. 이렇게 한 해 8000건이 넘는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
―누구보다 학교폭력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청예단을 찾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나.
“나 역시 처음에는 엄벌주의를 고집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기회를 줘야 한다. 상대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 화해 중재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우리 아들 때문에 못살겠다’며 도움을 청하는 부모님들의 사례를 찬찬히 살펴보면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 시스템도 문제다. 입시 위주로 가르치다 보니 인성교육에 소홀해지고, 아이들은 ‘지덕체(智德體)’를 골고루 쌓지 못한다. 교사가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성을 갖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들도 필요하다.”
―만약 청예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원망과 후회, 저주가 차곡차곡 쌓여 피폐한 삶을 살았을 거다. 알코올 중독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내던졌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살았다. 대현이 대신 태어난 게 청예단이니, 우리 단체가 늘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사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청예단 학교폭력SOS지원단과 화해·분쟁조정센터가 있는 서초동 건물을 유증기부했다.
“청예단을 시작할 때 무척 불안했다. 안정적인 일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인들의 도움과 은행 대출로 마련한 보금자리가 서초동 건물이다. 이곳에서 학교폭력 예방교육도 하고, 갈 데 없는 아이들의 쉼터도 제공해주며 청예단이 무럭무럭 성장하길 바란다.”
―향후 청예단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나.
“청예단 법률자문단과 서울지방변호사회 청소년지킴이변호사단을 합쳐 ‘청예단을 사랑하는 변호사들의 모임(가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지난 1월 ‘법률 현장 전문가 사례 토의’를 통해 판례를 나눈 것을 시작으로 학교폭력 갈등 확대 방지를 위한 대응법을 지속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아쇼카 펠로인 박유현 대표의 인폴루션제로와 업무 협약도 맺었다. 요즘 메신저나 SNS를 통한 사이버 학교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인폴루션(Infollution·음란물, 폭력물, 스팸, 개인 정보 유출, 악성 댓글 등 정보통신 오염)으로 인한 청소년 사이버 폭력을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보급하고, 인터넷 환경 교육에 나선다.”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못했을 것이다. 버텨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하지만 청예단도 어느덧 스무 살, 청년의 나이가 됐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나무 모양으로 선 로고처럼 학생들이 청예단의 푸른 그늘 아래서 앞으로도 계속 위로받을 수 있길 바란다. 청예단 직원들도 급여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으면 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폭력 없는 초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싶다. 한쪽에 학교폭력 관련 교육관을 만들어 청예단의 활동 자료들을 보관하고, 대현이나 다른 학생들의 작은 기념물을 비치해 그곳에서 부모님들이 차 한잔 하며 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