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패션
후원자 ‘취향 저격’ 이벤트 봇물… NGO가 달라진 이유는?

달라진 ‘후원자의 밤’ 트렌드 연말 후원자 행사 줄고, 상시 맞춤형 모임 늘어 몸짱 소방관 달력 등 후원자가 직접 모금 이벤트 기획까지 신규 후원자 발굴·모금 위한 대규모 후원의 밤 지속하기도 “1994년 르완다에선 100일 동안 80만명이 목숨을 잃는 대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르완다 아이들이 행복한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19일 저녁 7시, 조지 지타우 르완다 월드비전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후원자 100여명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울 여의도 월드비전 사무국에 모인 후원자들은 자신이 돕고 있는 르완다 아이들과 마을의 변화에 대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월드비전은 2008년부터 진행해온 연말 후원의 밤 행사를 2012년을 기점으로 전격 중단했다. 대신 월드비전 직원들과 후원자들이 만나 궁금증을 해소하는 ‘오픈하우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사업 성과보고회를 토크 콘서트 형태로 바꾼 ‘스토리 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을 수시로 열고 있다. 참여 대상도 후원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 김수희 월드비전 홍보팀 과장은 “후원자가 아니어도 관련 이슈에 관심 있는 분들이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참여의 장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비단 월드비전뿐만 아니다. NGO들의 후원의 밤 트렌드가 달라졌다. 연말에 후원자들을 대규모로 초청하는 일회성 행사 대신, 후원자들의 니즈에 맞춘 소규모 행사를 수시로 여는 곳이 늘고 있다. 컴패션은 2009년까지 진행했던 후원의 밤을 중단하고 2011년부터 1000여명이 참여하는 후원자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김윤아 컴패션 홍보팀 대리는 “컴패션을 후원하는 크리스천이 한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단체의 정체성과 비전을 다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면서 “후원자로 구성된

높은 연봉 받던 셰로다 반군지역 교사 자처한 이유는…

한국컴패션, 필리핀 비전트립 현장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후원자와 1:1 결연 통해 가난한 환경의 아이들을 바르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셰로다 몬타네즈(Shero da S. Montanez·22)씨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에 위치한 부투안(butuan)지역 공립 중고등학교 교사다. 올해 초, 높은 연봉의 사립학교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투안은 이슬람 반군이 주둔하고 있어, 저녁에는 밖을 나서기 어려울 만큼 치안이 열악한 곳이다. 한 시간 넘게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가도 학생들의 웃는 얼굴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부모님을 따라 반군에 가입하거나, 생계를 위해 농장 일에 동원된 아이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셰로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목수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저를 낙태할 생각까지 하셨다고 해요. 가난이란 절망에 빠져 있던 여섯 살 소녀의 삶에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근처에서 목공 작업을 하던 아버지에게 누군가 ‘셰로다를 컴패션 어린이센터에 등록하라’고 추천해준 거죠.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저는 그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의 어린이센터(PH620)에 등록된 셰로다는 어느덧 지역사회의 리더로 성장했다. 셰로다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146만여 명의 아이들이 컴패션을 통해 자라고 있다. 지난달 21일, 컴패션 후원자 25명이 5박6일 동안 직접 필리핀 어린이센터를 방문해 1:1 양육과정을 확인하는 ‘비전 트립(Vision Trip)’에 나섰다. ◇엄마 뱃속 태아에서 지역사회 리더까지… 1:1 양육의 열매 “여기가 너희 집이니?” 마일 도솔(Myl

나눔은 액션, 실천하는 용기가 중요해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 이상민씨 올해 후원자 100명 모아 활발한 후원 커뮤니티로 많은 후원자와 교류 막연한 생각만 하기보다 활동하는 곳에 발 들이면 봉사의 기쁨 느낄 수 있어 “영상 속 아이의 슬픈 모습을 보고 감성에 젖어 한 번 후원을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책임질 수 있는 후원자 100명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상민(33)씨는 올해 목표로 삼았던 ‘100명의 후원자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결속력을 가진 단단한 그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명 ‘컨티뉴(Continue) 그룹’이다. 80명의 후원자는 직접 아는 지인들이고, 나머지 20명은 지인이 소개한 사람들이다. 이씨는 각각의 이메일, 그룹 가입일, 누구의 소개로 만났는지, 언제 메일을 보냈는지 등의 항목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매번 체크한다. 그는 “컴패션 콘서트가 있거나, 후원모임이 있으면 문자를 보내거나 수시로 안부를 묻는다”며 “후원하는 어린이가 편지를 보내면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주기도 한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씨에게 “후원자가 한 명 더 생길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느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는 ‘마음이 움직이는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믿고 어떤 반응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엔 핀잔을 주던 친구들이 지금은 오히려 열혈 후원자가 돼서 다른 후원자를 만들기도 한다. “제 여동생이 대표적이에요. NGO 자체를 싫어하고, 제가 하는 일도 싫어했죠. 어느 날, 컴패션 콘서트가 있기에 초청했더니, ‘연예인 볼 수 있느냐’며 오더라고요. 이때를 계기로 컴패션 후원자가 되었고, 지금은 재능 기부도 하면서 얼마나 바뀌었는지 몰라요(웃음).” 이씨가 열정적으로 나눔에 동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벤트·공연 전문

[필리핀 컴패션 취재_백이선 후원자] “故 스완슨 목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후원 아이들 모두 손자·손녀처럼”

한국전쟁으로 부모·형제 잃었지만 스완슨 목사 도움으로 대학까지 마쳐 후원금 외에 생일잔치·건강검진 등 “내가 받은 사랑만큼 갚아나갈 것” 세부시 남쪽 ‘로레가 성 미구엘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무덤마을. 이곳에는 1만3000여명의 도시 빈민이 살고 있다. 1970년대, 집도 돈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묘지 내 비석과 비석 사이에 판자를 대고 함석을 얹어 집을 지은 것이 마을의 시작이다. 우리에게 리조트로 유명한 세부지만, 리조트에서 불과 20~30분 너머의 현실은 처참했다. 집들과 비석들이 한데 뒤엉킨 곳. 마약과 범죄, 매춘, 아동학대가 들끓는 무덤마을. 지난 11일 백이선(70) 후원자는 필리핀 ‘손자’ 리오넬(10)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덥고 습한 날씨지만, 손자를 위한 선물로 가득한 여행가방을 손에 꼭 쥔 채 말이다. 컴컴한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냄새와 탁한 공기 탓에 저절로 기자의 손이 코로 갔다. 하지만 백 후원자는 가슴을 꾹 눌렀다. 60년 전 어린 시절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는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었다. “부모님과 형제를 어떻게 잃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죠. 가족도 없고 집도 없으니, 하수구로 흘러내려 가는 수제비나 밥풀 찌꺼기를 주워 먹고, 길에서 잠자고…. 그렇게 살았죠.” 전쟁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마산애육원에 가서야 몸을 뉠 곳을 찾았다. 강냉이 죽일지언정 먹을 것도 생겼다. 낮에는 고아원 옆 작은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가냘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던 즈음, 그에게 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1952년

‘착한카드’로기부할 수 있는비영리단체어디 어디 있나?

위기가정 어린이가 행복하도록 ‘월드비전 인터내셔널’은 1950년 6·25전쟁 때 고아와 여성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월드비전 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4만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국제구호개발 NGO가 됐다. 한국 월드비전은 1950년부터 월드비전 국제본부의 원조를 받아 일대일 아동결연, 청소년 직업교육 사업을 위한 ‘직업보도소’ 설립, 사회복지관 설립 등의 국내 사업을 실시했다. 한국 월드비전이 국제본부를 통해 받아온 해외원조를 중단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한 것은 1991년이었다. 이후에는 국내 사업뿐만 아니라 해외사업, 북한사업을 수행해왔다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 월드비전은 전 세계 47개국 288개 사업장에서 지역개발사업, 에이즈 예방사업, 아동노동예방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전국 11개 종합사회복지관, 1개 장애인복지관, 12개 가정개발센터 등을 운영한다. ‘착한카드 캠페인’에서 한국 월드비전을 ‘지정기부처’로 선택하면 국내 위기가정 어린이를 도울 수 있다. 전국에 있는 월드비전의 종합사회복지관과 가정개발센터에 등록된 아동 중 부모가 갑작스럽게 실직을 하거나 재난 등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동이 있으면 담당기관의 사회복지사가 한국 월드비전 본부에 지원 신청서를 제출하고 후원금을 지원받게 된다. 문의 02)2078-7000 이 땅에 아픈 아이들이 없도록 기아대책은 1971년 래리 워드 박사가 설립한 국제구호단체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는 1989년에 설립되어 첫해 1억8000만원을 모금했고, 에티오피아·케냐·방글라데시·페루 등 7개국에 15만달러를 지원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원조 NGO다. 현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는 세계 77개 국가에 4280명의 스태프, 1068명의 기아봉사단을 파견해 각종 개발사업과 긴급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295개 지역회와 269개 운영시설에서 결손가정·독거노인·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 수자원개발 사업, 급식 사업, 북한 구호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70년대까진 도움 없인 못 사는 나라… 88올림픽 이후 도움 주는 나라로

6·25전쟁 후 국제 NGO에서 아동구호 손길, 60~70년대엔 지역·가정 개선사업으로 전환, 90년대, 원조 ‘홀로서기’… 토종 NGO 생겨나… ‘탯줄도 잘리지 않은 아기들이 밤새 항구에 버려져 있어요.’ 6·25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대 초반.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사무소 직원이었던 박미자씨가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쓴 글이다. 전쟁 기간 중 남쪽 사망자만 50만명을 넘었고, 행방불명된 사람을 합하면 그 숫자는 80만명을 넘어선다. 주택 61만채가 폐허가 됐고, 76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한국전쟁피해통계집). 해방 직후 어렵게 지켜온 산업 기반시설은 모두 붕괴돼 재건이 불가능해 보였다. 공업시설의 43%, 발전시설의 41%, 철도 312km가 파괴됐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 하지만 가장 힘든 이는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동의 피해가 컸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가족과 헤어진 아이만 10만명에 달했다. 남북한 전체 인구가 3000만명 남짓했던 시절이다. 이런 처참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재건의 씨앗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국제 구호단체들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고 적절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거리에서 만난 거지 소년이 들고 있던 깡통과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시애틀의 교회에서 보여주며 한국 돕기를 제안했던 에버렛 스완슨 목사 같은 이도 있었고, 부산 용주동에 방 2개짜리 사무실을 구하기 전까지 길거리에서 잠을 잤던 로버트 세이지씨 같은 이도 있었다. 구호사업의 초기인 1950~60년대에는 아동 구호사업이 구호 NGO의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세이브더칠드런’ 영국·미국 지부는 매년 3500명의 한국 아동들을 후원했고, ‘플랜’의 후원자들은 한국의 아동들에게 쌀·밀가루와 서양 의복 등을 보내왔다. 당시 문서에는 “아이들이 처음에 서양식 옷을

[Cover story] 빈곤퇴치 戰場 방글라데시를 가다

공부는 사치… 가난 탈출의 기회조차 없다 하루 15시간 쓰레기 주우면 간신히 하루 세끼 밥값 벌어 병원비가 두달치 생활비… 열병 걸려도 병원 근처도 못가 지난 18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뒷골목에서 만난 아이 라존(10)은 자기 몸집만한 쓰레기 자루를 메고 있었다. 시장과 주택가 사이에 놓인 쓰레기장은 40도에 가까운 방글라데시의 날씨와 맞물려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를 뿜어냈다. 아침 6시부터 라존은 썩어가는 음식과 폐기물 사이에서 종이와 플라스틱을 찾아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밤 9시 반. 해가 지고 도시에 어둠이 몰려와 더 이상 물체를 구별할 수 없을 때까지 이곳을 헤맨다. 이날 모은 종이와 플라스틱, 다 쓴 형광등 6개로 라존은 고물상에서 50타카(850원)를 받았다. 라존은 “오늘처럼 형광등을 주운 날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며 “세끼 밥값을 벌었다”고 웃었다. 시장의 소음과 경적 소리 속에서 라존은 매일의 삶을 굶주림과 노동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콜포나(10)는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 다닌다. 다카에서 380㎞ 떨어진 묵타가차(muktagacha)에 살던 콜포나의 가족은 인력거 운전사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고용하는 공장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아침부터 쪼그리고 앉아 재봉질을 해서 받는 돈은 한달에 3000타카(5만1000원). 얼마 전까지 평균 1800타카(3만원)였던 공장 임금은 최근 노동자들의 시위로 2배 정도 올랐다. 가장 역할을 하는 콜포나는 “집에 도움이 돼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어둡고 낡은 공장에서 천을 염색하며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콜포나는 파업을 얘기하며 벌써 어른이 됐다. 방글라데시의 5~14세 아동 노동 비율은 13%로 아시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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